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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月庾] 은애

"원상화 칠숙이 패했소. 유신랑의, 승리요!" 칠숙의 선언에 화랑 연무장 안이 떠들석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칠숙과 유신의 일방적인 대결에 마음 졸이던 용화향도의 낭도들부터, 어느 순간 큰 눈 가득 눈물을 흘리고 있던 공주와, 풍월주의 자리를 놓고 대립하던 다른 화랑들까지, 모두 진심으로 유신의 끈기와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비록 찬사를 받은 당사자는 정신을 잃고 힘든 숨을 내쉬며 낭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역시 깨어난다면 자신이 이루어 낸 결과에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월야는 고도의 등에 업힌 채 연무장 안 쪽, 화랑들의 숙소로 옮겨지는 유신의 등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유신이 누워있는 방에는 유신을 진찰하기 위해 온 의원과 만명부인을 비롯해 유신의 몸을 ..

일상덕질/기타 2015.11.01

[선덕여왕/月庾] 그리워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던 성벽 위에서 신라군의 승리를 알리는 뿔피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백제의 장수는 유신의 칼날에 부상을 입은 채 무장해제를 당했고 패잔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속속 항복했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불꽃과 곳곳에 널려있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전투의 치열함을 알려주는듯 했다. 일개월여에 걸친 포위작전이었다. 과연, 그곳은 악명높은 난공불락의 성이었고 유신을 비롯한 신라의 병사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신라군의 병영 안, 상장군 김유신의 아문기가 걸려있는 깃대에 부표를 매단 화살이 꽂힌 것은 유신이 이대로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 군을 철수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쯤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부표에는 백제군의 보급부대가 지나갈 길목과 날짜, 시간, 수송대의 수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일상덕질/기타 2015.11.01

[선덕여왕/月庾] 낮달

정신없이 외궁의 문을 빠져나와 수하가 준비해 둔 말에 오른 월야는 말의 배를 차 달려나가기 직전, 짧게 뒤를 돌아보았다. 늘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던 옅은 갈빛의 눈동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지금 이렇게, 이 곳을 빠져나간다면 아마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눈동자였다. 손에 쥐고 있는 검에는 방금 전 벤 신라 병사의 피가 얼룩져 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 끝의 핏방울을 보며 월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럇!」 월야의 재촉을 받은 말이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초겨울의 시린 바람이 월야가 달려가는 방향에서부터 불어와, 세차게 얼굴을 쳤다. 그 때문에 시큰하게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 월야는 살아오면서 단 한순간도 가야인이 아닌 적이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실체가 없는 나라의 왕자로 ..

일상덕질/기타 2015.11.01

[공부의 신/백현찬두] 사랑니

며칠 전부터 어금니 가장 안쪽의 잇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욕실 거울 앞에서 있는대로 입을 크게 벌려 입 안쪽을 살펴보던 찬두는 안쪽 잇몸 위로 하얗게 모습을 드러낸 사랑니를 발견했다. 혀끝을 움직여 슬쩍 만져보니 연하고 부드러운 잇몸 위로 딱딱하게 닿아오는 촉감이 낯설다. 크라는 키는 안크고 성가시게 사랑니가 먼저 나네. 예전에 누나가 사랑니를 빼고 와서 사흘 밤낮을 앓던 것이 떠오른 찬두는 인상을 찌푸리며 칫솔 위에 치약을 짰다. 양치질을 하다가 칫솔모가 닿은 사랑니 부분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 늦은 눈이 한번 내린 이후로는 날씨가 다시 매서워졌다. 달이 바뀌고 3월이 되면 찬두는 고3이 된다. 지난 겨울방학부터 찬두의 어머니는 입시학원 수강증을 과목별로 끊어왔다. 학원으로 되겠니? 역시 천하대생 ..

일상덕질/기타 2015.11.01

[트랜스포머/아이라쳇] 손가락

디셉티콘의 반란이 시작된 이래 사이버트론 행성을 채우고 있는 것은 포격으로 인한 먼지와 폭탄이 터지는 시끄러운 소음들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비행체들로 구성된 디셉티콘의 항공부대가 오토봇들의 진영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의 기습적인 폭격에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오토봇들이 즉시 반격을 시도했지만 하늘을 나는 자들과 땅을 달리는 자들의 차이는 쉽게 메울 수 없는 것, 한바탕 전투가 끝난 뒤 그 자리에는 여기저기 부서지고 잘라진 오토봇들의 몸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쥐새끼같은 디셉티콘.」 양 퍌의 무기들을 다시 손으로 트랜스폼 한 아이언하이드가 그 잔해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자신의 로켓포에 맞아 땅으로 추락해 버르적거리는 디셉티콘을 발견한 아이언하이드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스파크를 ..

일상덕질/기타 2015.11.01

[趙孔] 乘風

장강의 위로 부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칠성단에서 장강을 바라보며 바람을 가늠하던 제갈량은 백우선을 쥔 손을 허공으로 내뻗었다. 흰 학의 깃털이 떨리듯 동남쪽을 향해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장강의 건너편을 바라봤다. 위풍당당하게 정박해있는 조공의 군선들- 이제 곧 잿더미가 되어 장강에 삼켜질 그 배들은 자기들에게 불어닥칠 화염의 매서운 칼 끝을 상상이라도 하고 있을까.거기까지 생각하던 제갈량은 퍼득 정신을 차리고 길게 늘어진 거추장스러운 장포를 벗어버렸다.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풀어헤쳤던 머리카락을 수습하며 칠성단을 내려가니 단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오군 병사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병사 대신 남아있는 군마 한 마리는 아마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