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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趙] 눈의 노래, 한 번 더

221년, 봄 「…….」 천천히 종이 위를 가로지르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기어이 붓을 놓치고 말았다. 결이 거친 종이 위로 까만 먹물점이 번져간다. 글을 쓰던 종이에 얼룩이 졌으니 다른 종이에 옮겨 적어야 할까. 간만에 맑아진 정신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던 마초는 짧게 웃음 짓고는 아직까지 서탁 위에서 구르고 있는 붓을 집어 벼루에 기대어 놓았다. 지금 쓰고 있던 이것을 다시 쓰게 된다면 전혀 반대의 내용을 쓰게 될 것 같았다.어느 것이 더 내 본심에 가까울까. 종이 위에서 말라가는 먹물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초는 이 글을 받게 될 사람을 떠올렸다. 이제는 제국이 된 촉한의 초대 황제가 제위에 즉위하던 날 잠시 보았던 것이 마지막. 그 날 이후에도 그에게서는 꾸준히 안부를 묻는 서신이 왔지..

[馬趙] 눈의 노래

정월부터 성도의 하늘은 희뿌옇게 흐려 있었다. 애초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드문 촉의 땅이다. 조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얕게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공기중으로 퍼지는 모양새가 새삼 추운 날씨를 일깨워준다. 조금 빨리 말을 달린다면 해가 지기 전에 성 안쪽에 도착할 수 있을 듯 했다.조운이 유비의 명령으로 성도를 떠나있게 된 것이 벌써 육개월 전의 일이다. 그 사이 촉의 사정은 바쁘게 돌아갔다. 지난 해 위왕 조조가 숨을 거두고 뒤를 이은 조비는 기어이 한의 명맥을 끊고 제위에 올라 위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치 그에 맞서 한조를 잇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촉의 중신들 사이에서 유비의 칭제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아마도 조만간 유비는 촉한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

눈싸움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어보니 새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태양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호오, 밤 사이 눈이 꽤 많이 내렸구나." 밤새 눈이 내린 날씨 치고는 바람이 그다지 매섭지 않다. 유비가 감탄처럼 내뱉은 말에 유비의 처소 앞에서 뜰로 이어지는 길의 눈을 치워내고 있던 병사들 몇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유비에게 예를 취했다. 유비는 웃으며 손짓으로 그들에게 하던 일을 계속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동안 느긋한 아침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쪽 정원 한켠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웅다웅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려퍼지다가 작은 물체 두 개가 툭, 하고 유비의 처소 안뜰로 튀어들어왔다. 머리부터 온통 눈가루를 뒤집어 쓴 조카들이었다. 정신없이 놀다가 유비의 처소까지 들어온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趙孔/外] 환상을 따르다

오장원에 자리한 촉의 병영은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총 군세 30만의 대군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상황, 침묵은 간절한 기원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부름을 받고 공명에게 향하던 마대는 목적하고 있는 공명의 거처 근처에 새로 만들어진 작은 막사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며칠 전, 공명은 강유에게 막사를 세우고 그 안에 작은 제단을 차릴 것을 명령했다. 더 이상 병사들에게 병이 깊어진 것을 감추지 못해 병영이 불안에 술렁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렇게 제단을 차려놓고 장군들을 불러 공명이 한 말은 마대에게 있어선 조금의 현실성도 보이지 않는 말이었다. 「일주일 동안 제단의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자신의 수명이 열두 해..

[遼郭] 北辰

말하자면 그는 드넓은 초원 밤 하늘의 북신 같은 이였다. 장료는 막사 안에서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곽가를 보며 어린 시절 말을 타고 달리던 초원의 별을 떠올렸다. 키 작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녹색의 풀들이 바람에 흩날리던 그 곳에서 장료는 거칠 것 없이 말을 달리고는 했었다. 초원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온 몸이 이 너른 초원 위를 부유하는 듯 한 아찔함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그는 그 감각에 매료되어 매일 밤 홀린 듯 말을 타고 초원을 찾았다. 특별한 표시도, 정해진 길도 없는 곳이었지만 단 한 번도 곤란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보면 늘 같은 자리에 한결같은 북신이 떠 있었고 그 북신은 언제나 장료에게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 "장료, 잠시 이 쪽으로." 곽가가 ..

[趙孔] 산책 - 적벽movie ver.

"이 잔은 주도독의 쾌유를 바라며 마시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에는 없는 주유에게 예를 말하고 술을 들이키는 조운을 바라보며 공명은 버릇처럼 턱의 수염을 매만졌다. 적벽 근처에서 벌어진 조조군과의 첫 육지전의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의 한 중간이었다. 승리의 주역이나 다름없는 주유는 전투에서 몸을 날려 조운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았고 지금은 자택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터다. 주유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나 다름없는 조운은 그의 상태가 꽤나 신경쓰이는 모습이었다. 다소간의 소란과 잠재적 불안을 안은 채이긴 했지만 어쨌든 연회는 무사히 끝났다. 손오의 공주에게 혈을 찍힌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호들갑 속에서 눈을 떴지만 공주의 무례에 대해 크게 마음을 두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연회장을 나온 ..

[선덕여왕/月庾] 순장

이미 숨이 멎은지 한참이 지나보이는 아기의 사체를 필사적으로 가슴에 품고 복야회의 산채 앞에 다다른 여인은 반쯤 실성한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모진 고생을 다 한 끝에 황무지에 손바닥만한 땅 한뙈기를 경작하고 살았다 하던가. 그것이 겨우 세 가족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 만큼이 되었는데, 일년도 채 못가 그 또한 신국의 땅이라 하며 몰수당한 뒤, 선처를 호소하러 관에 간 남편은 반주검이 되어 돌아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여인은 여러 날을 굶어 아이에게 물릴 젖조차 나오지 않았고, 아이는 굶주림에 지쳐 울지조차 못했다. 손으로 꽁꽁 얼은 땅을 파 겨우 캐낸 나무뿌리를 잘게 씹어 아이의 입에 물려가며 걸식을 전전하던 그녀는, 복야회의 첩자들에게 발견되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했다..

일상덕질/기타 2015.11.01

[선덕여왕/月庾] 무릎베개

백제군과의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던 국경의 전선에서 드디어 기다리던 승전보가 서라벌의 왕궁까지 도착했다. 백제군은 점령하고 있던 성을 내준 채, 사비 근처까지 퇴각을 했다고 한다. 근래에 없던 대승, 그리고 유신이 상장군 직함을 달게 된 이후 첫 승전이었다.전선에서 돌아와 여왕의 앞에 승리를 보고하기 위해 인강전으로 향하는 동안, 유신이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던 길을 멈추고 찬사와 축하를 보내왔다. 유신은 그 찬사 하나하나에 예의바른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공을 세운 개선 장수의 표정 치고는 미묘하게 가라앉은 모습에 모두들 작은 의문을 안게 되었다. "그런데 늬 장군님, 왜 저렇게 기분이 안좋아 보이는 거냐?"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산탁이 인강전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대풍과 고도를 잡아 끌..

일상덕질/기타 2015.11.01

[선덕여왕/閼庾] 은애2

풍월주 비재의 마지막 관문인 무술 비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 비재를 위해 수련에 힘쓰던 화랑들도 오늘만큼은 내일의 비재에 최상의 몸상태로 참가하기 위해 일찍 돌아간 탓인지 짙은 어둠이 깔린 수련장에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가장 늦게까지 수련장에 남아있던 알천은 달이 중천에 떠오르는 것을 본 이후에야 들고 있던 수련용 목검을 내려놓았다. 내일 있을 무술 비재에서 그들은 반드시 가장 유력한 후보인 보종을 꺾어야 했다. 비록 덕만이 무사히 공주로서 인정을 받았다지만 여전히 수많은 귀족세력과 병부의 세력을 쥐고 있는 미실에 비하면 그들은 약세일수 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미약한 왕권의 뒷받침과 양날의 검 같은 가야세력 뿐. 그리고 그런 열세 속에서 무거운 책임감..

일상덕질/기타 201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