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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孔←趙] 상처

「주공과 주모님은 우리가 형주로 잘 모시고 가겠소. 이 혼례로 인해 두 집안의 결속이 더욱 강해졌으니 주모님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누구보다 소중한 분, 그러니 요란스러운 배웅은 그쯤에서 멈추시고 돌아가 오후께 그리 전해주시오!」 공명이 뱃머리에 서서 동오의 군사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조운은 배의 난간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동오의 군사들에게 쫓기는 상황은 언제나 기분이 좋지 못하다. 서로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지도 않은 채 대치하면서 동맹국이라니. 표면의 관계성 아래에는 여러가지 정치적이고 실리적인 상황들이 얽혀있겠지만 이래저래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배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고 오군 병사들이 쏘는 화살들은 거의가 뱃전에도 미치지 못한 채 힘을 잃었다. 이제는 안전권이다. -라고 생각한 순..

[關平/關興] 태산 아래 작은 나무

힘껏 바라보기조차 어려웠던 아버지는 누구도 쉬이 넘을 수 없는 태산太山이었다.깎아지른 벼랑길을 달려 당도한 비보. 지고했던 태산이 한순간 풍화되어 더 이상 그 굳건함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 순간 사지육신을 잘린 하늘의 비통한 땅울음이 울었다.험준한 한중의 구석에서 서촉땅의 끝까지 그 땅울음을 들은 이들은 바람결 한 자락, 마른 풀 한포기 마저 지독한 비탄을 토해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군에게 사로잡혀 참수된 목은 위왕에게 진상되었다 하던가. 위왕은 그 목에 맞는 몸통을 맞춰 이미 극진한 장례도 치뤘다 하는데, 정작 그 장례를 모셨어야 할 못난 아들은 그 소식이 마냥 꿈인듯 느껴져 비탄의 눈물도, 통한의 절규도 뽑아낼 수 없었다. 아직도 이 눈 앞에는 지고의 태산이 우뚝 서 있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諸葛兄第] 만남

공명은 배가 시상의 선착장에 정박하기 전 부터 선실을 나와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큰 상선이 드나드는 만큼 항구는 복잡한 활기를 띠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융중에서라면 곧장 강하로 내려와 배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지만 강하의 황조는 강동의 주인과 여전히 창칼을 맞대고 대치중인 상태였다. 결국 먼 길을 돌아 강동 땅에 들어선 공명의 얼굴에는 익숙하지 않은 여행길에 쌓인 여독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공명은 잠시 크게 숨을 내쉬며 선착장을 내려다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섞여있는 와중에도 반가운 표정을 한 형의 얼굴과 단번에 눈이 마주친 것에 공명의 얼굴에서도 살그머니 긴장이 풀렸다. +++ 「균은 함께 오지 않은 것이냐?」「아무래도 아직까지 형님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瑜策/外] 단문모음

瑜策 :: 미지근한 바람이 강가의 갈대를 스치고 낮게 불어왔다. 더 이상 문상을 올 사람도 없는 늦은 시간, 빈소를 지키며 선잠에 들었던 주유가 퍼득 정신을 차려 비어있는 옆자리를 보고는 그를 찾으러 나온 참이었다. 완만하게 경사가 진 갈대숲의 한켠에 희끄무레한 삼베옷이 비쳤다. "상주라는 녀석이 빈소를 비우고 이런 곳에 나와 있으면 어떻게 해, 백부." 질책하는 말에도 흘끔 쳐다보기만 할 뿐, 손책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주유는 한숨을 내쉬며 손책의 곁에 걸터앉았다. 얼핏, 무심한 얼굴에 눈물길이 비친듯도 했지만 그 역시 모른척 했다. 고개를 젖힌 주유는 손책이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그곳에는 별이 촘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렸을 때," 한참 뒤에 겨우 한 ..

[瑜策] 내기

수풀 사이로 짐승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 그 곳에 숨은 것이로구나. 손책은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숨을 죽이고 있던 짐승은 빨라지는 말발굽 소리에 위기를 느낀 것인지 풀쩍 몸을 날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달아나고 있는 짐승은 뿔이 멋지게 돋은 숫사슴이었다. 아직은 조금 찬기를 품고 있는 바람이 손책의 뺨에 스쳤다. 전동에서 화살을 한 대 꺼내어 시위를 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저 녀석만 잡으면…!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는 순간 손책은 그것이 사슴의 급소에 명중할 것을 예감했다. 퍽, 퍽. 빠르게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사슴의 가죽을 뚫고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었다. 명중이다. 그런데 뭔가 다른 소리가 섞여있었다. 뭐지..

[趙孔] 단문모음

봄 :: 한 밤중, 등 뒤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에 문득 잠에서 깼다. 아직은 잠에 취해 있는 멍한 의식으로도 방 안이 낯설었다. 어디였지, 여기. 무의식적으로 뒤척이는데 허리께에 올려진 묵직한 것이 함께 움직였다. 흰 침의의 소매 사이로 단단히 다져진 손끝이 보였다. 아. 그제야 생각났다. 공명은 조운에게서 계양의 항복을 무리없이 받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유비와 함께 내려온 길이었다. 그 사이 딴 마음을 먹은 전 계양태수가 일을 꾸민 모양이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다 정리가 되어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비는 전 계양태수가 하필 '그런' 일을 꾸민 상대가 자룡인 것이 운이 없었다며 실소를 터트렸다. 공명은 그 일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밤에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조운이 답지 않게..

[테니프리/료후지] 가을의 온기

밤새 내린 비가 여름의 잔재를 모두 휩쓸어갔다. 9월도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니, 어쩌면 조금 늦은 감이 있는 가을비였다.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후지는 쌀쌀한 아침 공기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맑은 날씨였지만 내리쬐는 햇살의 끝에서 시린 조각을 발견했다고 하면 너무 조급한 생각일까. 아무튼, 추운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중학 3년 이후 요 몇 년간 함성과 함께 기억되고는 하던 여름이 끝나는 것은, 후지가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금 아쉬운 일이다. 엊그제 머리를 잘라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알싸한 가을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학교에 도착할 무렵 블레이저의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메일을 수신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방금 공항 도착했어요. 학교 끝날 때쯤에 맞..

일상덕질/기타 201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