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은 배가 시상의 선착장에 정박하기 전 부터 선실을 나와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큰 상선이 드나드는 만큼 항구는 복잡한 활기를 띠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융중에서라면 곧장 강하로 내려와 배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지만 강하의 황조는 강동의 주인과 여전히 창칼을 맞대고 대치중인 상태였다. 결국 먼 길을 돌아 강동 땅에 들어선 공명의 얼굴에는 익숙하지 않은 여행길에 쌓인 여독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공명은 잠시 크게 숨을 내쉬며 선착장을 내려다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섞여있는 와중에도 반가운 표정을 한 형의 얼굴과 단번에 눈이 마주친 것에 공명의 얼굴에서도 살그머니 긴장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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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은 함께 오지 않은 것이냐?」
「아무래도 아직까지 형님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함께 오지 않은 막내동생에 대해 물으며 제갈근은 서운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막내인 균과는 나이터울이 많아, 형제간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대면한 것이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원, 녀석. 아무리 서먹하다 한들 한 동기간인데 무얼 그리 저어하는지.」
「유난히 수줍음이 많고 얌전한 아이입니다. 그래도 지난 관례 때 형님께서 자를 내려주신 일로 며칠을 기뻐했습니다.」
「역시 내가 그 아이의 관례를 치룰 때 가 보아야 할 것을 그랬다. 그렇게 서찰 한 통으로 마무리 지을 일이 아니었는데.」
큰 형을 어려워해 얼굴 내비치기를 힘들어하는 막내동생에 대한 서운함이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바뀌는 형의 모습을 보며 공명은 고개를 숙여 웃음지었다. 사실 막내인 균과 비교될 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명 역시 형 제갈근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살가운 형제 사이는 아니었다. 서주에서 난이 일어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직후에는 잠시동안 소식이 끊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을 뿐, 늘 형이 동기간인 자신들의 일을 걱정하고 있음을 공명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땐 형수께서 해산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형님께서 토로장군께 중임되신 후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은 균도 잘 알고 있을겁니다.」
「이번 기회에 강동으로 터를 옮겨오는 것은 어떻겠느냐. 이제 가족이라야 남은 것은 우리 삼형제 뿐인데 형제간에 얼굴 보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되겠느냐. 이제 너도 나이가 찼으니 출사를 원한다면 이 형이 도와줄 수도 있고.」
무릎 위에 놓여진 공명의 손을 잡으며 제갈근이 말했다. 잠시 겹쳐진 손을 바라보던 공명은 빙긋 웃음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손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량아.」
「형님께서 이렇듯 저희들을 생각해 주시는데 서로 터를 잡고 있는 곳이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자주 인사 드리지 못하니 이 아우의 죄가 큽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 않느냐.」
「알고 있습니다, 형님. 다만 이 아우, 아직 배움이 미욱하여 섣불리 토로장군께 출사하였다가 외려 형님께 누가 될까 걱정이 되어 그러합니다.」
「…….」
그 말에 한동안 공명의 눈을 바라보던 제갈근은 어쩔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어 그리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마.」
「형님.」
「비록 오래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나 내가 네 형이다. 나는 내 아우가 지금처럼 초야에 묻혀 일생을 보낼 이가 아님을 안다.」
「…….」
「그래. 때론 기다림이 필요하기도 하겠지. 더군다나 너는 아직 젊은 나이이니 말이다.」
툭툭, 제갈근이 붙잡고 있던 공명의 손을 격려하듯 두드렸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제갈근의 저택 앞에 당도해 덜커덩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아담한 대문 앞에 제갈근의 처를 비롯한 두 세명의 식솔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공명이 마차에서 내리자 가까이 다가온 형수가 반갑게 공명을 맞았다. 처음 대면하는 형수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조용하고 사려깊은 인상의 여성이었다. 형수의 곁에 유모인듯 한 이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는 몇달 전 돌이 지난 큰조카였다. 이제 조금씩 말문을 튼다 하는 조카는 낯선 공명이 무서운 듯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영특해보이는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차례대로 제갈근의 식솔들과 인사를 나눈 공명은 제갈근의 안내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는 제갈근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듯 고요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제갈근이 가장 먼저 공명을 데려간 곳은 저택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방문을 열자 어딘지 모르게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방의 한 쪽에 자리한 작은 침상 위에는 내일이면 세상의 빛을 본지 백 일이 된다는 어리디 어린 두번 째 조카가 작은 몸을 뉘이고 있었다. 공명이 먼 강동까지 걸음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아기 때문이었다.
「제가, 이름을 지어주면 좋겠다 하신 아기가 이 아기입니까, 형님.」
「그래. 무사히 백일을 넘길듯 하니 이름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공명은 아기의 침상에 걸터앉아 단풍잎같은 손을 건드렸다. 아기는 꼭 쥐고 있던 손을 꼼지락 펴서 공명의 검지손가락을 붙잡고는 기분이 좋은 듯 웃음지었다. 포동포동하고 보드라운 뺨에 복숭아빛의 홍조가 드는 것을 본 공명은 제갈근을 향해 물었다.
「아기를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형님.」
「물론이다. 그 아이는 첫째에 비해 낯을 가리지도 않더구나. 배냇짓도 곧잘 하는 온순한 아이이다.」
제갈근의 허락을 들은 공명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올렸다. 몸이 움직이는 느낌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아기는 공명이 눈을 마주치며 얼르자 다시 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팔 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아기의 존재감과 따뜻한 체온에 공명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네 얼굴이 참으로 햇살처럼 따사롭구나. 아가, 저 해처럼 높은 곳에서도 따사로이 아래를 품는 이로 자라겠느냐.」
공명이 조근조근 말을 걸자 아기가 손을 뻗어 공명의 입술을 건드렸다.
「네게 교喬라는 글자를 주마. 높게 뜬 해처럼 자라거라. 교아야, 해환海煥아. 만나서 반갑다. 내가 네 숙부, 량이니라.」
공명이 아이의 뺨에 제 뺨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아기는 숙부에게서 받은 제 이름글자들이 마음에 든 듯 작은 입술을 움직여 옹알이를 했다. 다시금 아기 특유의 달큰한 젖내음이 공명의 코끝을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