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료는 막사 안에서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곽가를 보며 어린 시절 말을 타고 달리던 초원의 별을 떠올렸다. 키 작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녹색의 풀들이 바람에 흩날리던 그 곳에서 장료는 거칠 것 없이 말을 달리고는 했었다. 초원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온 몸이 이 너른 초원 위를 부유하는 듯 한 아찔함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그는 그 감각에 매료되어 매일 밤 홀린 듯 말을 타고 초원을 찾았다. 특별한 표시도, 정해진 길도 없는 곳이었지만 단 한 번도 곤란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보면 늘 같은 자리에 한결같은 북신이 떠 있었고 그 북신은 언제나 장료에게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
"장료, 잠시 이 쪽으로."
곽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린 장료는 곽가의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두 눈은 여전히 지도에 고정시킨 채 턱을 만지작거리던 곽가는 오환의 본대가 진을 치고 있는 유성 근처를 손으로 짚었다.
"오환의 본진까지 하루 반, 가능할 것 같나?"
"또 무리한 이야기를 하는군 봉효."
장료의 대답에 곽가가 노골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장료와 눈을 맞추었다. 사백리가 넘는 길이다. 수송대를 포함한 대군이 행군하는 데에는 빨라야 하루에 사오십리가 한계다. 그런 장료의 생각을 읽은 듯 곽가가 비죽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설명이 부족했나보군. 군을 전부 끌고 가자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이끄는 기마대를 말하는 거야. 기마대 1만."
"기마대만으로 오환의 본진을 상대하겠다는 건가?"
"어차피 그들의 대부분은 기병이다. 괜스레 보병을 앞세우는건 쓸데없이 희생을 늘릴 뿐이지."
어때? 하며 장료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곽가는 이미 긍정이 아닌 대답은 허용하지 않을 기세였다. 장료의 입가에 어쩔수 없다는 듯 쓴웃음이 걸렸다.
"다소간의 낙오자는 염두에 둬야 할 거다."
"당신이 훈련시킨 기마대다. 대장이 쓰러지지 않는데 먼저 널부러지는 쭉정이들로 훈련시킨 것은 아니겠지?"
"…이봐, 이런 지형에서는 말도 쉽게 지치고 다칠 위험도 많아."
"완급을 조절해서 낙오자를 줄이는 것도 당신 역량이야."
지도 위, 오환의 본대에 작은 조조군 깃발 모형을 꽂으며 곽가가 자신만만하게 미소지었다.
곽가에게서 기마대만으로 오환의 본진을 기습한다는 계획을 들은 조조는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출발은 내일 정오. 유성에 도착해야 할 한계시간은 다음 날 술시. 병력면에서 오환에 비해 불리하긴 하지만 적들은 조조군이 열흘은 더 걸려야 유성에 도착할 것으로 보고 있을 터다. 그들이 방심한 사이 기습한다면 승률은 충분하다는 것이 곽가의 판단이었다.
"가끔 난 네가 기발한 건지 무모한 건지 판단하기 힘들 때가 있다."
조조의 막사를 나오며 장료는 조금 앞서 걷고 있는 곽가를 향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곽가는 걸음을 멈추고 장료를 돌아봤다.
"아직도 나에게 엄살을 부리고 싶은 건가?"
"봉효."
"탕구장군, 그 이름이 아깝소. 아무래도 이 군제주 님 께서 위로를 해드려야 겠구려."
"봉효!"
곽가에게 성큼 다가선 장료가 세게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곽가의 입은 여전히 호선을 긋고 있었다.
"말을 가져와."
"뭐?"
"그 엄살을 받아주겠단 말이다, 장료. 당신은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 어울려줄테니 어서 말을 끌고 와."
즐거운 기색마저 느껴지는 곽가의 얼굴에 장료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곽가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떼고 말 우리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장료의 말은 조조군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마였다. 사람 둘을 태우고 달리면서도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다.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간간이 곽가의 머리카락이 흩날려 장료의 뺨에 닿았다. 진영을 나와 제법 멀리까지 말을 몰았을 때 곽가가 입을 열었다.
"장료, 당신 혹시 밤 하늘에서 북신을 찾을 수 있나?"
"당연한 것을 묻는군."
장료는 서서히 말의 속도를 줄이며 곽가의 물음에 대답했다. 이윽고 말이 완전히 멈춰섰을 때 곽가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봐. 북신이다. 다른 별들은 계절에 따라 위치가 바뀌지만 북신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지. 그래서 저 별은 그것이 필요한 이에게 방향을 제시해 줘."
"……."
"하지만 장료, 그 북신이 제시하는 방향을 보고 길을 찾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곽가는 뒤를 향해 상반신을 살짝 돌려 장료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자면 나는 북신인거다. 그리고 내가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 길을 찾는 것은 당신의 역할이야."
말고삐를 잡고 있는 장료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내가 세운 작전이 기발한 묘책이 될지 무모한 실책이 될지는 모두, 당신 손에 달려있다."
"…위로를 해준다더니 부담만 더해주고 있군."
"그런 소리 하지 마. 당신이 나를 멍청하고 무모한 참모로 만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곽가가 한쪽 손을 들어 장료의 뺨을 감쌌다. 얼굴에는 곽가에게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조금은 오만해 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장료의 입에서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부터 질 생각 따위 없었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봉효."
"장문원. 조조군 최강의 장수이지. 나 곽봉효가 인정한. 그러니 이기는 것은 물론이고,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와 내 믿음에 보답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장료의 입에 곽가의 입술이 닿았다. 장료는 말고삐를 놓고 한손으로 곽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이 사람이 곁에 있는 한, 망망한 초원을 겁없이 달리던 어린 시절 처럼 결코 자신은 방향을 잃는 일이 없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