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바람이 강가의 갈대를 스치고 낮게 불어왔다. 더 이상 문상을 올 사람도 없는 늦은 시간, 빈소를 지키며 선잠에 들었던 주유가 퍼득 정신을 차려 비어있는 옆자리를 보고는 그를 찾으러 나온 참이었다. 완만하게 경사가 진 갈대숲의 한켠에 희끄무레한 삼베옷이 비쳤다.
"상주라는 녀석이 빈소를 비우고 이런 곳에 나와 있으면 어떻게 해, 백부."
질책하는 말에도 흘끔 쳐다보기만 할 뿐, 손책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주유는 한숨을 내쉬며 손책의 곁에 걸터앉았다. 얼핏, 무심한 얼굴에 눈물길이 비친듯도 했지만 그 역시 모른척 했다. 고개를 젖힌 주유는 손책이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그곳에는 별이 촘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렸을 때,"
한참 뒤에 겨우 한 마디를 내뱉은 손책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목소리마냥 아주 깊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 ……."
"그 때도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백부."
"지금은 조금, 믿고 싶어져."
밤 하늘에서 유난히도 밝은 빛 하나가 길게 꼬리를 그으며 떨어져내렸다. 그 빛을 끝까지 눈으로 쫓던 주유는 더 이상 빛이 보이지 않자 손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꼬리에도 유성을 닮은 물빛이 맺혀 있었다. 손 끝으로 그것을 받아내며 주유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 아주 조금의 위로라도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權瑾 ::
어렸을 땐 동생과 이렇게 함께 목욕을 했었습니다. '함께' 했다기 보다는 제가 그 아이를 씻겨주기 바빴지만 말입니다.
으음.... 몇 살때까지 그랬나?
제가 낙양으로 떠나기 전의 일이니 관례를 치루기도 전이지요.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땐 형님께서 손수 목욕을 시켜주기도 하셨었지…. 그건 동기간이니 그럴 수 있다 치고, 다른 이와 이렇게 함께한 적은 없다는 거지?
…이것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주공…….
아, 그래. 그럼 됐네. 그렇게 불편한 얼굴 하지 말게 자유. 나는 물 속에서 자네와 몸이 닿으니 마음이 더 편해져.
주공.
정말이야. 정말로…….
陸呂 ::
최근들어 여몽은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다. 군의나 훈련, 약간의 서류결제 같은 공무가 끝나면 막사의 한구석이라던가 수군훈련이 끝나고 정박해있는 군선의 선미라던가 하는 한적한 곳으로 사라지기 일수였다. 덕분에 육손은 공무시간을 제외하면 여몽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사라지는 건 어쩜 그리도 바람같은지. 대체 무슨 일이 있는건가 싶어 주유를 붙잡고 물어봤지만 그는 재미있다는듯 한 웃음을 띈 채 '자명이 주공께 한 소리 들은 모양이지.' 하는 알수 없는 말만 할 뿐이었다. 결국 참다 못해 군사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여몽의 행방을 물어 병기고로 향하는 그를 봤다는 말을 듣고는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자명님, 여기 계십니까?"
예고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여몽을 불렀는데 대답 대신 와르륵 죽간 쏟아지는 소리만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본 것은 한눈에 보아도 제법 많아보이는 양의 죽간 무더기와 당황한 표정으로 육손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몽이었다. 여몽의 한쪽 손에도 죽간이 들려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맹자에 춘추, 손에 들고 계신 그것은 손자병법 아닙니까?"
"아, 마…맞네 백언."
"도대체 왜 이런 곳에 평소엔 거들떠도 안보시던 경전들을 쌓아두고 계신겁니까!"
"안본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못본거네!"
"얼마 전까지 남는 시간이 지루하다면서 절 끌고가 기어코 대련을 하게 한 건 어디의 누구십니까!!"
육손의 말에 여몽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답지 않게 우물쭈물 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들고 있던 죽간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꼈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다가 육손을 한 번 바라보고는 무언가 크게 결심한 듯 무겁게 입을 연다. 말인즉슨, 손권에게 '자네도 무력에만 의지하는 한낱 무부로만 살 수는 없지 않겠나.' 하는 요지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주공의 말씀이 지당하신 것도 같고…."
그런데 다 늦어서 학식을 쌓으려 하니 더듬더듬 경전을 읽어나가는 것도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썩 좋은 꼴은 아닌듯 해 계속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다녔다는 그런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육손은 여몽이 이제라도 학문을 익힐 결심을 한 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사람들을 피하고 혼자 구석에 쳐박히는 것은,
"곤란합니다."
"응? 뭐가 곤란하다는건가?"
"저와 자명님, 둘 다 곤란합니다."
"왜 곤란한데?"
"하여간 곤란합니다. 그러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자네 시간을 빼앗기는 미안하고-"
"미안하실 거 없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육손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죽간 하나를 주워들었다. 경전의 구절 옆으로 그 해석들이 빽빽하게 세필로 적혀있었다. 그러니까, 혼자 구석에 쳐박혀버려서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그게 곤란하다는 겁니다. 죽간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내며 육손은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눈 앞의 여몽은 여전히 의문섞인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연, 육손 ::
밤늦은 시간까지 오군의 대도독인 육손의 막사에선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새벽달이 기울 때 까지도 그 막사에 그렇게 불을 밝히고 있는 날들이 많다 했다. 막사 앞을 지키던 병사의 안내를 받고 육손과 대면한 주연은 눈에 띄게 피곤해보이는 육손의 까칠한 얼굴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해가 뜨는 즉시 병사들을 이동시키려 합니다."
이번 전투에서 주연은 따로 별동대를 맡아 유비의 선봉을 교란시켜야 했다. 주연의 말에 육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을 들어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이릉에 포진하고 있는 유비는 그 어느때보다도 강하고 기세가 등등한 적이었다. 그런 적을 맞아 싸워야 할 군대의 대도독이 밤잠 못이루고 고심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지금 육손의 모습은 병자로 오인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문득 주연은 이 전쟁의 시발점과 육손의 해묵은 과거를 떠올렸다. 그의 집안이 현 오후인 손권의 가형 손책에게 한 번 풍비박산이 났던 것은 오의 중신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한 이야기였고, 형주 수복과 관우의 참수에 대해서는 육손 역시 깊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게 손권의 의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항간에 유비의 침공과 관련하여 주공을 원망하는 말들이 떠돌더이다."
제 뼈를 깎아가며 승리를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번쯤은 그 속내를 떠보고 싶은 심술궂은 마음이 일어난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뜬금없는 주연의 말에 육손은 지도를 내려다보던 눈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주공께서 무리하게 형주를 얻으시고 유비의 의제인 관우까지 참수를 해 지금의 사달이 났다, 하는 말들입니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육손의 안색이 주연의 말을 듣는 순간 더욱 희게 질렸다. 그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경악에 가까웠다.
"그 무슨 불충한 말들이…! 군영 내에 그런 무도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는 말인가!"
진심으로 충격받은듯 한 육손의 반응에 주연은 다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까지 정색을 하면 가볍게 떠보려 한 이쪽이 괜히 미안해지지 않나.
"다행스럽게도 군영 내에 떠도는 말들은 아닙니다. 제가 괜히 대도독의 심기만 더 어지럽게 해드렸군요.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대도독께서도 좀 쉬어두십시오. 유비를 잡기 전에 먼저 쓰러지시겠습니다."
주연은 육손이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예를 취하고 막사를 나섰다. 밖은 아직도 흐린 달빛에 시야를 의지해야 하는 한밤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