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에는 없는 주유에게 예를 말하고 술을 들이키는 조운을 바라보며 공명은 버릇처럼 턱의 수염을 매만졌다. 적벽 근처에서 벌어진 조조군과의 첫 육지전의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의 한 중간이었다. 승리의 주역이나 다름없는 주유는 전투에서 몸을 날려 조운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았고 지금은 자택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터다. 주유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나 다름없는 조운은 그의 상태가 꽤나 신경쓰이는 모습이었다.
다소간의 소란과 잠재적 불안을 안은 채이긴 했지만 어쨌든 연회는 무사히 끝났다. 손오의 공주에게 혈을 찍힌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호들갑 속에서 눈을 떴지만 공주의 무례에 대해 크게 마음을 두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연회장을 나온 공명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강바람에 한껏 달아올랐던 취기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공명 역시 꽤 많은 양의 술을 받아마셨다. 이대로 방에 돌아가 쉬는 것 보다는 조금 산책을 하며 머리를 맑게 하는 것이 좋을듯 해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조운의 숙소 앞까지 도착했을 때, 방 문 밖에서 낯선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운을 발견했다. 이야기의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조금 심각해보이는 얼굴표정에 안도가 깃든 것은 볼 수 있었다. 남자가 조운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것을 본 공명은 조운을 향해 말을 걸었다.
"우리 군의 사람은 아닌 듯 한데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길래 얼굴이 밝아지십니까, 조장군?"
"군사."
공명은 손에 들고 있던 학우선을 부치며 조운에게 다가갔다.
"주도독 댁에서 보내온 사람입니다. 걱정을 하고 있을까봐 일부러 보내주셨더군요. 치료는 무사히 끝났고 상처도 곧 아물것이라 하십니다."
"다행한 일이군요."
"그런데 군사께서는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강바람이 시원해서 취기나 좀 가라앉힐까 하고 걷고 있던 중입니다."
"호위도 없이 말입니까?"
조운이 묻는 말에 공명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조와의 첫 싸움이 막 끝난 후이고, 강의 건너편에 대군이 진을 치고 있으니 아무리 오의 진지 한복판이라 해도 언제 조조의 첩자나 자객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조운은 한숨을 내쉬며 공명에게 말했다.
"아직 산책을 더 하실 생각이시라면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그,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투가 끝난 직후라 피곤하실텐데."
"군사를 혼자 두었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조금 피곤한 편이 훨씬 낫습니다."
조운은 방으로 들어가 검을 손에 들고 나왔다. 공명은 조운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것 같아 흠흠 하고 멋쩍은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무예에 소양이 전혀 없는 자신은 위험을 만나게 되면 변변히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한동안 공명은 발길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 걸음을 옮겼고 조운은 그런 공명의 뒤를 묵묵히 따라왔다. 맞은편으로 조조의 군선들이 보이는 망루까지 왔을 때 공명은 잠시 멈춰서서 조조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오늘, 장군들께 큰 부상 없이 전투가 끝나서 다행입니다."
"적장을 상대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날아오는 화살조차 알아채지 못한 저에겐 조금 쓴 이야기로군요. 주도독께서 막아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큰 부상이 되었을테니 말입니다."
조운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공명은 학우선을 부치며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 점은 저도 주도독께 감사드리는 바이지만, 사실 전투 지휘를 하시다가 그렇게 직접 전장에 뛰어드실 줄은 몰랐습니다."
공명이 잠시 전투를 바라보며 눈을 뗀 사이에 주유는 병사 몇을 이끌고 전장 속에 섞여버렸다. 그가 뛰어난 지략 만큼이나 무에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부상을 입은 채로도 조조군의 기를 빼앗아 거꾸로 땅에 꽂는 모습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 분도 일군을 지휘하는 도독이기 전에 한 사람의 무인이시니, 그저 전장을 바라보고 있을수만은 없었던 것이겠죠."
"무인의 피가 끓는다는 것인가요."
"뭐...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적한 곳에서 밭을 갈고 책이나 읽던 제가 느껴보기엔 요원한 감정이겠군요."
"모든 사람이 칼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담담하게 웃으며 말하는 조운을 보니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하고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만약 주도독께서 화살을 막아주시지 않았다면 그 화살은 조장군의 어디에 박혔을까요."
"...그 위치에서라면 아마 목이나 머리쯤이 되었겠지요."
그쯤 되는 위치라면 단 한 발의 화살로도 충분히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었다. 공명은 조운이 알아채지 못하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그때가 정말 조운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정말 주도독께 감사해야겠군요."
공명은 몸을 돌려 조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시 그런 공명의 움직임에 당황하던 조운은 곧 팔을 들어 공명의 어깨를 감쌌다.
"미덥지 못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군사."
"저도 무예를 한 번 배워볼까요?"
"갑자기 무슨......"
"주도독은 저렇게 직접 전장에서 싸우면서도 군사들을 훌륭하게 지휘하시는데 저는 호위가 없이는 산책조차 마음 편하게 할 수 없으니 한심한 노릇 아닙니까."
"군사는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싫습니다. 혹시 압니까? 제가 무예를 익혀 함께 전장에 나올 수 있게 된다면 그때 또 조장군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드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만큼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만. 게다가 군사를 방패로 쓰느니 그냥 그 화살 맞고 악착같이 살아남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 화살 맞고 그냥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으니 그 발언은 그냥 넘어가드리겠습니다."
"군사가 보고계신데 전장에서 죽을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 끝까지 기억하고 계셔야 합니다."
공명은 조운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늦은 밤의 강바람은 차가웠지만 끌어안고 있는 몸은 따뜻했고, 또 조운의 심장 뛰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