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단에서 장강을 바라보며 바람을 가늠하던 제갈량은 백우선을 쥔 손을 허공으로 내뻗었다. 흰 학의 깃털이 떨리듯 동남쪽을 향해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장강의 건너편을 바라봤다. 위풍당당하게 정박해있는 조공의 군선들- 이제 곧 잿더미가 되어 장강에 삼켜질 그 배들은 자기들에게 불어닥칠 화염의 매서운 칼 끝을 상상이라도 하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제갈량은 퍼득 정신을 차리고 길게 늘어진 거추장스러운 장포를 벗어버렸다.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풀어헤쳤던 머리카락을 수습하며 칠성단을 내려가니 단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오군 병사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병사 대신 남아있는 군마 한 마리는 아마도 오의 수군 대도독 주유의 마지막 배려 겸 경고와도 같은 것이리라. 함께 동맹을 맺고 조공에 맞서 개전을 하였다고는 하나 오의 수뇌부는 주유를 필두로 아직까지 반 유비의 기운이 팽배하게 퍼져있는 상태였다.
이제부터 동오의 땅을 벗어날 때 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남겨져있는 군마의 빠른 발과,
미리 마중을 부탁한 장군과의 무사 합류 뿐이었다.
-아시겠습니까? 무리하게 몸을 세워도 안되지만 기수가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웅크려서도 안됩니다.
귓가에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리는 법을 가르쳐주던 낮은 목소리가 스쳐갔다. 유비를 따라 융중을 나와 신야에 온 제갈량이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것은 기마술이었다. 초야에 파묻혀 공부만 해 온 서생으로서는 좀처럼 군대식의 기마술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 비교적 평화로운 형주 유표의 객장으로 있는 유비라고는 하나, 이 난세에 언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그 때, 유비군 안에서도 발군의 기마실력을 갖는다는 장군의 도움으로 직접 타 본 군마는 지금까지 잠깐씩 이용했던 일반 말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고삐를 쥔 손에서 긴장을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되도록 말의 시야와 비슷한 높이를 유지하시면 됩니다. 어찌되었건 오랜시간 말과 신뢰를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럴 여건이 안된다면,
등 뒤에서 여러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큰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동오의 판단력과 행동력은 빨랐다. 주유는 감시병을 두지 않고 말 한마리를 내어준 것으로 제갈량에게 가진 개인적인 호의의 몫을 다 했다. 지금 저들에게 잡히게 된 다면 무언가 한 마디 더 할 틈도 없이 숨이 다 하게 되리라.
-그럴 여건이 안된다면 말을 제압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이럇!"
고삐를 틀어쥐고 말의 배를 찼다. 한 층 빨라진 속도에 눈이 아파왔지만 앞을 응시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앞으로 조금, 약속된 장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뒤쫓아오는 병사가 쏜 화살이 머리채를 스치고 훨씬 앞의 나무기둥에 박혔다.
달려라, 나는 이런 곳에서 죽지 않는다.
조공이 주랑에게 크게 패할테니 내 주군의 시대는 이제부터 꽃을 피울 것이다.
또 하나의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로 비껴갔다. 아직 말에 대한 자신이 없는 상태라면, 아무리 위급할 때라 해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다시 귓가에 젊은 장군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멀리, 작은 나룻터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익숙한 백마. 환청인 듯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현실에서 자신을 부른다.
"군사!!"
미끄러지듯 옆을 스쳐 지나간 백마는 그 주인과 함께 제갈량을 향해 날아오는 무수한 화살을들 쳐내고 제갈량의 목숨을 위협하던 동오의 병사들을 반대로 위협해나갔다. 창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몇 번의 단말마.
온 힘을 다해 질주하는 말을 멈추게 했다. 고삐를 쥐고 있던 손바닥은 가죽줄에 쓸려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고개를 숙이고 헐떡헐떡 모자란 숨을 내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군사, 무사하십니까?"
가볍게 병사들을 쫓아보내고 돌아온 장군- 조운이 말 등에 엎어진 채 크게 숨만 내쉬고 있는 제갈량에게 물었다. 하지만 제갈량에게는 그 물음에 대답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일만 한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한동안 제갈량을 살펴보던 조운은 피가 묻은 손바닥을 보고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늘어져있는 제갈량을 안아 자신의 백마에 앉혔다.
"기운이 조금 나실 때 까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가누기 힘든 고개를 지금 자신을 감싸안듯 지탱하고 있는 조운의 어깨에 기대었다.
"아직 군마는 좀 서툰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이만큼 훌륭하게 타고 오신 것을 보니 가르쳐드린 보람이 있군요."
조금 위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가 더없는 안도감을 전해준다. 이제 자신이 돌아오는 것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주군에게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제갈량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구에 도착할 때까지 곁을 지킬터이니 조금 쉬십시오.
화염이 모든것을 태우고 난 후에는 우리의 싸움이 시작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일단 그 목소리가 하는 말에 따르기로 했다. 눈을 감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느낌에 몸을 맡겼다.
덤.
하구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제갈량은 죽은듯이 잠이 들어 있었다. 상처가 난 제갈량의 손바닥에 약을 바르던 조운은 잠결에도 다친 곳이 쓰라린 듯 미간을 움찔거리는 제갈량을 보며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오의 병사들이 쏜 화살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제갈량을 피해갔다. 조금, 바람이 잘못 불기라도 했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동맹국이라고는 하지만 분명한 적대세력이 존재하는 곳에 단신으로 보내놓고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이 사람이 알기는 할까.
손을 들어 반듯한 이마에 헝클어져있는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필사적으로 도주를 했으니 체력도 정신도 이렇게 지칠법 하다. 입술이 하얗게 말라있었다.
".....ㄹ"
"군사?"
웅얼거리는 소리에 입 가까이로 귀를 댔다. 무의식적으로도 갈증이 나는지 물을 찾고 있었다. 과연, 이대로 두었다가는 탈수증에 걸릴 수도 있다.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며 혀를 찬 조운은 작은 접시에 물을 따라 제갈량의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몸은 그저 물을 흘리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조운은 또 다시 제갈량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고는 푹, 어깨를 떨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접시에 든 물을 입 안에 머금었다.
이런 건 별로 익숙하지 않단 말입니다.
속으로 불만을 투덜대고는 제갈량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힘 없이 벌어지는 입술을 열고 혀를 움직여 말라있는 제갈량의 입 안으로 물을 흘려넣는다. 평소보다 훨씬 감겨오는 것을 보니 목이 마르긴 말랐던 모양이다. 몇 번 반복되어진 행위의 끝에 맞닿은 입술이 조금은 촉촉해졌다.
원하는 만큼 물을 받아마신 제갈량은 다시 숨소리조차 크게 나지 않는 잠으로 빠져들었다. 조운은 그런 제갈량에게서 몸을 떼어놓고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가에는 어쩔수 없는 쓴웃음이 베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