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덕질/삼국지 촉
[馬趙] 눈의 노래
정월부터 성도의 하늘은 희뿌옇게 흐려 있었다. 애초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드문 촉의 땅이다. 조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얕게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공기중으로 퍼지는 모양새가 새삼 추운 날씨를 일깨워준다. 조금 빨리 말을 달린다면 해가 지기 전에 성 안쪽에 도착할 수 있을 듯 했다.
조운이 유비의 명령으로 성도를 떠나있게 된 것이 벌써 육개월 전의 일이다. 그 사이 촉의 사정은 바쁘게 돌아갔다. 지난 해 위왕 조조가 숨을 거두고 뒤를 이은 조비는 기어이 한의 명맥을 끊고 제위에 올라 위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치 그에 맞서 한조를 잇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촉의 중신들 사이에서 유비의 칭제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아마도 조만간 유비는 촉한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위에 대한 도발이었고 아주 오랜 시간동안 유비군을 지탱해준 명분이기도 했다. 여전히 유비군의 주적이 제위를 찬탈한 위 임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구심점인 유비가 한중에 머물며 준비하고 있는 전쟁은 강동의 손오를 향한 것. 일년 전, 멀리 형주에서부터 관우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유비는 그 날 이후 단 하루도 손오 정벌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조운은 성도에 들른 뒤 신년인사 차 한중의 유비에게 갈 계획이었지만, 유비가 여전히 손오 정벌에 반대하고 있는 조운을 반가워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무거운 구름을 잔뜩 안고 있던 흐린 하늘에서 차가운 알갱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눈조차 잿빛이다. 조운은 혀를 한 번 차고는 말을 채근했다. 갑작스럽게 말의 속도를 높인 조운의 뒤로 강주에서부터 따라온 종자가 허둥대며 쫓아왔다.
성도에 도착한 조운은 궁의 한 켠에 딸려있는 관사에 여장을 풀었다. 조운은 성도에 따로 저택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중에 가 있는 유비를 대신하여 성도의 일을 맡아보던 제갈량이 오래간만에 성도로 돌아온 조운을 반갑게 맞았다. 해가 바뀌어 막 열 네살이 된 유선은 조운을 보자마자 그 품으로 달려들어 눈물을 글썽였다. 어려서부터 전쟁터의 한복판에 서 있던 아이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촉 땅을 둘러싸고 있는 지금의 분위기에 반응하고 있었다. 유선을 달래놓고 방을 나서는 길에 제갈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곧 주공께서 황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예상은 했습니다. 주공께서 결국 결단을 내리셨군요."
"조금 서두른 감이 없진 않지만 형주로 출전하시기 전에 즉위식을 열 생각입니다."
반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핼슥해진 제갈량의 얼굴을 보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조운과 함께 유비의 손오 정벌을 필사적으로 말리던 이 중 하나였다. 성도에서 전쟁을 위한 모든 후방준비를 도맡아 하는 가운데 유비를 황제로 추대하는 일까지 진행하고 있으니 쉴 틈도 없이 일에만 매달려 있었을 것이 뻔하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주공께서 군사의 얼굴을 보신다면 손오 정벌이나 제위 즉위, 둘 중 하나는 포기하겠다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왕이면 손오 정벌을 포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운의 말에 제갈량이 소리내어 웃으며 대꾸했다. 조운은 그런 제갈량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이 내리는 중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루같이 흩날리는 눈은 바닥에 쌓이지 않고 바람이 불 때 마다 작게 회오리 치며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그 모양 만큼이나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채 웅성였다. 잠시 말없이 중정에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던 제갈량이 문득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성도에 도착해 바로 궁으로 오신 겁니까? 마 장군의 저택에는 들리지 않으시고……."
"일단은 군사와 유선 님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겠다 생각하여 바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사실 궁으로 오면 모두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요 몇 달 사이 마 장군께서는 저택에서 쉬는 일이 많으십니다. 때때로 이유없이 신열이 올라 자리에 누워계시는 일이 잦으신지라."
"금시…초문 입니다."
"역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강주까지 소식을 전하지는 않은 모양이로군요."
제갈량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쓰게 말했다. 조운은 처음 듣는 마초의 와병 소식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조운이 강주로 가게 된 이후 서로 일이 바빠 가끔식 서신을 주고받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마초에게서 서신을 받은 것은 보름 전이었지만 몸 상태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적혀있지 않았다. 한 순간 차갑게 굳어버린 손끝이 참을 수 없이 아려왔다.
++
"의원의 말로는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한동안 열에 시달리시다가도 한순간 털고 일어나시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쉽게 일어나질 못하셔서……."
마초의 방으로 조운을 안내하던 마대는 마초의 병세에 대해 조운에게 설명을 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로서도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혈육이 오랜시간 병상에 누워있는 것이 여간 걱정이 아닌 듯, 눈가에 짙은 피로가 머물러 있었다.
"언제부터……?"
"글쎄요. 처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까지 되신 건 석달쯤 됩니다만, 아마 그 이전에는 숨겨오신 게 아닐까요. 저 조차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으니까요."
마대는 마초의 방문 앞까지 조운을 안내한 후 짧게 인사를 하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갔다. 문의 안쪽에는 등잔조차 켜놓지 않았는지 조금의 빛도 비쳐오지 않았다. 조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안쪽을 향해 말했다.
"…맹기, 조운일세. 들어가겠네."
조운이 고하는 말에도 방 안쪽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열에 들떠 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운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다 방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맹기…?"
정면의 열려진 창을 통해 찬 밤바람과 가루눈이 방 안쪽으로 세차게 들이닥쳤다. 비정상적인 방의 상태에 놀란 조운이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열에 들떠 누워있다는 방주인은 보이지 않은 채 침상마저 싸늘하게 식어있다. 혹시나 싶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지만 사람이 빠져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창틀을 쥐고 있는 조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들이치는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며 체온을 빼앗았지만 그것보다는 마음속의 불안을 그대로 느끼는 듯 크게 울리는 스스로의 고동소리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조운이 가까스로 이 상황을 마대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창에서 조금 멀어졌을 때, 등 뒤로 불덩이처럼 뜨거운 손이 다가와 목과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나는 당신이 성도에 돌아온다면 가장 먼저 나를 만나러 올 줄 알았는데."
"맹기!"
"얼마나 얼을 빼놓고 있었으면 명색이 무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쉽게 등 뒤를 빼앗길 수 있는거지?"
메마른 숨결이 귓불을 스쳐 턱선을 훑고는 목덜미 근처에 머물렀다. 조금 전까지 찾고 있던 이의 목소리와 체온인데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져, 조운은 숨을 집어삼켰다. 몸을 돌려 마초를 마주보려 했지만 마초는 조운을 끌어안고 있는 팔을 풀려 하지 않았다.
"몸이, 많이 안좋다고 들었는데."
"반년 가까이 당신을 못 봐 상사병이 난 것이라 하면 믿어줄까?"
마초가 고개를 들어 조운의 입가에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팔의 힘이 느슨하게 풀리며 조운이 살짝 마초와 마주보는 자세가 되자 입가를 배회하던 마초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조운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맹기, 하고 마초를 부르려던 말은 혀끝에서만 맴돌다가 입을 가르고 침입한 마초의 혀와 섞이면서 다시 묵직하게 가슴께로 내려앉았다. 마초의 체중을 받쳐내기 위해 뒷걸음질 하던 조운의 등이 열려져 있는 창의 바로 옆 벽에 닿는 순간 아주 조금의 간격을 두고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금 가까워지며 입 밖으로 내어놓지 않은 모든 언어를 교환하듯 맞물렸다. 조운은 각도가 바뀌어 벌어진 틈 사이로 힘겹게 새어나오는 숨마저 놓칠수 없다는듯 거듭해 입을 맞춰오는 마초의 등을 끌어안고 옷깃을 꽉 움켜잡았다. 긴 입맞춤 끝에 마초가 설핏 웃음 지으며 말했다.
"당신도 내가 꽤나 보고싶긴 했나보군. 이렇게 적극적으로 응해준 적은 처음인것 같은데."
"나도 자네와 반년이나 떨어져 있던 것은 마찬가지니까."
"성도로 오자마자 성으로 간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 기다려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내가 먼저 만나러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어. 여전히 매정한 사람이라고 욕을 퍼붓고 있었지."
질책하는것 같은 말의 내용과는 달리 조운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에는 장난기마저 느껴졌다. 마초가 한쪽 손을 들어 차갑게 식어있는 조운의 뺨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열려있는 창문으로 인해 이미 실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온도의 방 안에서도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마초의 손에 조운은 표정을 흐리며 마초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마초의 얼굴에 조금 곤란함이 묻어났다.
"이렇게 몸에서 열이 들끓는데 창문을 열어놓으면 어떻게 하나? 오늘은 눈까지 내려 특히나 추운데."
조운이 마초의 손을 떼어놓고 열려있는 창을 닫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마초가 다가와 그것을 제지했다.
"맹기?"
"당신 말대로, 이런 추운 날에도 몸이 너무 뜨거워서 조금, 괴롭거든."
"맹기,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렇게까지 상태가 안좋다면 왜 나에게 알리지 않은……."
"만약 아픈게 당신이었다면 당신도 나에게 알리지 않았을거잖아. 게다가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야. 그저 간만에 당신을 만나서 엄살을 부리는거지."
"…엄살이 아니지 않나. 이렇게 마른 주제에."
조운은 홀쭉해진 마초의 얼굴이 못내 안타까운듯 손을 들어 뺨을 쓸어내렸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입맞춤의 도중 끌어안았던 마초의 등은 예전의 탄탄한 근육 대신 척추의 마디만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호위장군이라는 별명이 울고 가겠군."
"맹기, 나는……"
"아직 나는 멀쩡해. 불안하다면 직접 확인시켜줄까."
어느샌가 마초가 조운의 허리띠를 풀러냈다. 느슨하게 풀어진 앞섶 사이로 파고들어온 손은 차가워진 피부 위에 불로 지진 낙인을 찍는것 같다. 한순간 마초의 몸상태가 걱정되었지만 옷을 끌어내리며 다시 입술을 맞대오는 움직임에 조운은 망설임을 멈추었다.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마초의 체온이 필요했다. 맨등에 닿는 침상의 싸늘함에 작게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흡사 관 속을 연상시키는 냉기여서, 조운은 급하게 손을 내밀어 마초의 얼굴을 부여잡고 이번에는 제 쪽에서 먼저 입맞춤을 시작했다. 마초의 몸에서 느껴지는 건조한 열기는 오래 전, 첫 주군을 잃은 후 전국을 유랑할 때 가 보았던 사막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얽고, 팔을 뻗어 마초의 몸을 끌어안았지만 힘껏 움켜쥐어도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그렇게 마초도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해왔다. 순식간에 등골이 송연해진 조운의 움직임이 굳어버린듯 멈추었다. 힘없이 떨어진 조운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덧쓴 마초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서 속삭였다.
"괜찮아,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그래…, 그렇지."
조운은 자신의 쇄골 근처에 입술을 떨어뜨리며 안쪽으로 파고들어올 준비를 하는 마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씩 섞여드는 체온에 거칠어진 호흡이 겹쳤다. 조운은 눈을 감고 마초의 손끝에서부터 전달되어오는 감각으로 마음 한 구석에 장막을 쳤다. 마초의 말대로였다. 조운은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
서량인들은 마초를 금마초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했다. 흑자색의 수직비단에 금사로 수를 놓은 마초의 장군기가 전선에 포진하는 것만으로도 변방 이민족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실로 그는 금빛의 비단을 끝없이 풀어놓은듯한 사막의 지배자였으니 그만큼 어울리는 호칭이 없었으리라.
유비군으로 귀순할 때의 마초는 만신창이가 된 채였지만 찢어지고 더러워진 장군기 아래에서도 곧게 편 등만은 꼿꼿하고 당당했다. 식솔들이 인질로 잡혀있는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항거를 멈추지 않았던 한결같은 결백함과 전신 여포의 재림이라 평해질 정도였던 눈부신 무용, 그리고 특유의 자유로운 기질은 누구도 그를 초라한 패배자로 여기지 못하게 했다. 마초가 서 있는 곳은 더 이상 서량의 사막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는 금마초였다.
"……."
몇차례 마초와 몸을 나눈 후 얕은 잠에 들었던 조운은 옆자리의 마초가 몸을 일으켜 침상을 빠져나간 직후 잠에서 깼지만 기척을 내지 않은 채 가만히 시선으로 마초를 쫓았다. 또 다시 활짝 열린 창으로 가까이 간 마초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창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창백한 달빛이 마초의 어깨를 지나 침상 바로 앞까지 드리워졌다. 마초와 몸을 맞대며 겨우 되찾았던 체온이 다시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조운은 얇은 옷감 한겹에 가리워져 있는 마초의 등을 바라보다가, 방 안으로 불어들어오는 바람결에 간간이 다른 소리가 섞여있는 것을 알아챘다. 조용히, 무언가를 달래는듯한 낮은 비음. 마초가 바람에 실어보낸 그 소리는 방 안을 한바퀴 돌아 조운의 귓가를 스치고 흩어졌다. 한동안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조운은 음이 완전히 사그라든 후 침상 위에서 내려와 마초의 등 뒤에 섰다.
"잠을 재우는 노래인데 그걸 듣고 깨다니, 당신도 참 어지간하군."
"자장가였나?"
"강족의 자장가야. 서량의 아이들은 대부분 이 노래를 들으며 자라. 내 아버지는 할머니에게서, 내 동생들은 어머니에게서, 그리고 내 아이들은 내 아내에게서 이 노래를 들으며 잠에 들었지."
어느샌가 눈이 그친 하늘은 드물게 맑아 밝은 달빛이 여과없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입자가 고왔던 눈은 하얀 천을 깔아놓은 것처럼 땅 위에 얇은 막을 만들었다. 잠시 조금 먼 곳으로 시선을 두던 마초는 조운이 말릴 사이도 없이 창틀을 훌쩍 뛰어넘어 맨발로 땅 위를 디뎠다.
"맹기!"
"오늘 날씨는 정말 마음에 들어. 당신, 혹시 사막에 눈이 오는걸 본적 있나?"
"무슨 짓인가, 어서 들어오게! 그리고 사막에 무슨 눈이 온다는 말인가."
마초의 행동에 기겁하며 질책하는 와중에도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잊지 않는 조운의 말에 마초는 웃으면서 정원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드물지만 사막에도 눈이 올 때가 있어. 하지만 그 눈은 모래 알갱이보다도 더 작고 가벼운데다가 땅에 떨어지자마자 녹아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라, 밤새 눈이 내린다고 해도 두껍게 쌓이는 일은 없어. 지금 이곳을 덮고 있는 눈처럼 말이야."
마초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올 기색이 없자 조운은 서둘러 침상의 발치에 걸려있던 자신의 장포를 걸쳐입은 후 방의 한쪽에 놓여있는 마초의 외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창틀을 뛰어넘어 정원으로 내려섰다. 서량에 있던 마초의 저택과 최대한 비슷하게 꾸며놨다는 눈 내린 정원에는 마초의 발자국이 무늬를 그리듯 찍혀있었다. 마초의 뒤를 쫓는 조운의 귓가에 다시금 자장가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끊어질듯 낮게 들려오는 비음은 누군가를 어르는듯도 했고 위로하는듯도 했다. 소박하지만 단조롭지 않고 온도가 느껴지지 않지만 결코 차갑지 않은 다정함이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마초를 따르던 조운은 노랫소리가 멈추고 마초가 제 자리에서 더이상 움직이지 않자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 있는 조운을 돌아보지 않은 채 마초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직도 유비님의 손오 정벌을 반대하고 있지?"
"맹기."
"나는 전장군을 직접 만난적은 없지만, 그가 유비님이나 우장군- 장비님에게 어떠한 의미의 사람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어. 아마도 나보다는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가."
"더이상 유비님께 반대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 오후를 향한 칼끝은 어떻게든 유비님 스스로가 결착을 보지 않으면 안돼.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그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후를 잡고 싶을거야. 잡아서, 전장군의 무덤 앞에 무릎꿇린 후 사지를 찢고 싶겠지. 실제로 유비님은 그럴 작정으로 손오 정벌을 준비하고 계신 것일테고."
"처음부터 나나 군사가 하는 반대는 주공과 장비님께는 무의미했네."
"그만큼 오후에 대한 원한이 깊은 것이겠지. 그런데 당신은 혹시 방덕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조조에게 투항한 자네의 부장이 아닌가. 관우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그 분께 죽은."
"그는 아주 오랜시간동안 내 아버지의 가장 믿음직한 부하였고 나에게도 충성스러운 이였어. 그러나 각자의 길이 갈렸으니 나는 그의 죽음이 슬프긴 해도 그것 때문에 전장군을 원망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가슴 깊이 경애하는 아들이 하나 있어. 필시 전장군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겠지. 이런 시대라서인지, 누군가에게 원한을 주지도, 갖지도 않고 산다는건 참 어려운것 같아. 목숨은 태산보다 무겁지만 또한 깃털보다 가벼운 것이고, 우리들은 무장이니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일텐데."
잠시 말을 멈춘 마초가 천천히 조운을 돌아보았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자조와 비애를 안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진 마초의 얼굴에 조운은 숨을 집어삼켰다. 방 안에서 마초와 체온을 맞대며 가려두었던 불안함은 조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다시금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초는 자신의 향한채 굳은듯 서있는 조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항복하지 않으면 식솔들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할것을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고, 결국 허도에서 이백명이 넘는 내 피붙이들이 참수당했어. 내 아내와 아이들은 눈앞에서 밧줄에 목이 매달려 죽었지. 각오는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조조에게 격렬한 증오심과 원한을 품게 되는 것은 어쩔수가 없더군. 그 순간은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어. 아니, 느낄새가 없었다는게 더 옳은 말일까. 반드시 조조를 내 손으로 잡고 말겠다, 내 창으로 그 숨통을 끊어 죽은 이들을 위로하겠다, 온통 그 생각 뿐이어서 그때까지 내세우던 대의는 어느샌가 변명이 되어있을 뿐이었지."
말을 잇는 마초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조운은 마초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잡았다. 불덩이같은 마초의 몸은 식은땀에 잔뜩 젖은채 오한이 일어 떨리고 있었다. 조운이 급히 들고있던 외투를 마초에게 걸쳐주며 말했다.
"맹기, 어서 방으로-"
조운이 마초의 양 어깨를 감싸듯 부축해 방으로 돌아가려 할때 몸을 가누기 힘든듯 다리에서 힘이 빠진 마초가 주륵 미끄러졌다. 놀라서 마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 조운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가가 물기에 젖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초의 손이 매달리듯 조운의 팔을 잡았다.
"작년, 조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내 가족들의 죽음이 슬퍼졌어. 오랫동안 기억조차 하고 있지 않던 옛 노랫소리가 떠오르면서. 슬픔이 생겨났다면, 대상을 잃은 원한은 사라져야 할텐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걸까. 나는 왜 내 손으로 조조를 죽여 내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했을까. 지금 내 목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그렇게, 스스로를 향하게 된 나의 원념들이겠지."
"나는… 조조가 죽은 이후 자네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네.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었어. 그저 자네가 괜찮기만을 바랐지. 나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던건가, 맹기. 자네의 안에서 방향을 잃은 그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기에는 나로서는 역부족이던가. 내가 강주로 떠나지 않고 자네 곁을 지켰더라면……."
조운이 가만가만 등을 쓸며 하는 말에 마초가 작게 웃음지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그래서 나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던 그 때에도 당신이 특별하고 소중했던 거겠지. 그래도 어쩔수 없는 것이 있어. 한평생 목숨을 걸었던 대의마저 돌아보지 않게 돼. 아마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은 아직 잃은게 없으니까. 잃으면 안되는 것들을 여전히 당신의 손으로 잘 지켜오고 있으니까."
"…이대로라면 자네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 당신을 안으면서 처음으로 후회를 했어. 나는 당신의 사람이 되지 말걸 그랬지."
"맹기…!"
"정말, 그러지 말 것을…그랬지."
기어코 마초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본 조운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마초는 완전히 몸을 조운에게 기대며 또 다시 숨을 골랐다. 마초가 흘리는 눈물로 조운의 어깨자락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쏟아지는 달빛이 마초의 등 위에 겹쳐진 조운의 손에 희미한 경계를 그리다가 어느샌가 다시 몰려들기 시작한 구름에 가리워졌다. 천천히 음영이 드리워지는 자신의 손과 마초의 등을 바라보며 조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혹여 내가 죽어도 당신에겐 다른이에 대한 어떤 원한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거야."
힘겹게 말을 마친 마초가 조운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어느샌가 잔뜩 흐려진 하늘에서 또다시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릴 가루눈이 떨어졌다.
+++
그 해 4월, 유비는 성도에서 즉위식을 갖고 촉한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정식으로 손오를 정벌하러 출진할 것임을 포고했다. 5월이 되어 출진의 시기가 가시적으로 다가오자 강주에서 병력보충 및 보급을 맡고 있는 조운 역시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바빠졌다. 하루에도 몇번씩 한중과 강주 사이에서 전령들이 오갔고 때때로 장비가 있는 낭중에서도 연락책이 다녀갔다. 모든 명령이 유비가 있는 한중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성도에서는 따로 사자가 올 일이 없었다. 때문에 한밤중 성도에서부터 침통한 표정의 사자가 당도했을 때 조운은 그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표기장군, 양주목, 태향후 마초 맹기 지병으로 별세.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정월의 그 날, 단 한번 들었던 마초의 비음섞인 노랫소리가 귓가에 스치는듯 했다. 조운은 마초의 사망소식으로 인해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좌중을 뒤로하고 막사를 나왔다. 성도와는 달리 맑은 날이 많은 강주의 하늘에는 그날따라 달조차 뜨지 않았다. 조운은 걸음을 옮기며 가만가만 그 음을 떠올렸다.
"자네가 눈을 감을 때, 누군가 자네를 위해 이 노랫소리를 들려주었을까, 맹기……."
조용히 조운에게서 마초를 위한 노래가 흘러나와 바람속에 실렸다가 이내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달래듯, 위로하듯, 듣는 이가 편히 잠들기를 기도하듯 이어지던 자장가였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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