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숙의 선언에 화랑 연무장 안이 떠들석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칠숙과 유신의 일방적인 대결에 마음 졸이던 용화향도의 낭도들부터, 어느 순간 큰 눈 가득 눈물을 흘리고 있던 공주와, 풍월주의 자리를 놓고 대립하던 다른 화랑들까지, 모두 진심으로 유신의 끈기와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비록 찬사를 받은 당사자는 정신을 잃고 힘든 숨을 내쉬며 낭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역시 깨어난다면 자신이 이루어 낸 결과에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월야는 고도의 등에 업힌 채 연무장 안 쪽, 화랑들의 숙소로 옮겨지는 유신의 등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유신이 누워있는 방에는 유신을 진찰하기 위해 온 의원과 만명부인을 비롯해 유신의 몸을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했다. 대부분 유신이 죽은듯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다가 돌아갔는데, 그렇게 번잡하던 그 방 앞에 사람들의 방문이 끊기게 된 것은 해가 서쪽으로 반쯤 넘어갈 시간이 될 즈음이었다.
한동안 조용하게 해질녘의 정적이 머물러 있던 유신의 방 문 앞에 길게 사람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월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유신이 누워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옅은 약냄새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침상 가까이로 다가가 얼굴 이곳 저곳에 상처가 나 있는 유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월야는 유신이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리자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침상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유신의 머리 맡에 놓여진 물그릇에 걸쳐져 있던 천을 집어든 월야는 얼굴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게 주의하면서 땀에 젖은 유신의 얼굴을 닦아냈다. 옷깃 사이로 슬쩍 보이는 어깨에는 시퍼런 멍이 맺혀 아마 한동안 고생을 해야 할 듯 보였다. 그래도 뼈나 내장이 상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얼굴을 닦아주는 월야의 손길이 닿자 유신은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아주 잠시간의 긴장을 자아냈다. 유신은 언제쯤 깨어나게 될까. 하루를 꼬박 새운 비재로 인해 피로가 쌓인 것 뿐이라는 의원의 말에 월야는 스스로도 우스울 정도로 안도해버렸다.
칠숙과의 비재 도중, -기실 그것은 비재라고 하기도 힘든 일방적인 공격과, 그 공격을 버텨내는 시험이었지만- 연무장 안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하루 밤을 꼬박 샌 힘든 몸을 하고서도 유신의 눈빛은 굳은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복야회의 산채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몸이 포박당한 채 언제 죽을지도 모를 적진에서 월야에게 당당하게 충성을 요구하던 그 눈빛을 월야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맑은 갈색의 눈동자에 곧은 의지가 흘러넘치는 유신의 모습은, 월야가 살아오면서 보아온 몇 안되는 감탄 어린 모습이기도 했다. 동맹을 맺자는 유신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도 유신을 믿고 싶은 마음이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라는 것을, 월야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표면적인 동맹 외에, 어느 순간부터 유신을 볼 때마다 피어오르는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감정 역시 인정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아마도 평생동안 그에게 가슴 한 쪽을 내어준 채 살게 되리라. 때로는 그로 인해 지금처럼 마음 졸이고, 또 때로는 기뻐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며 안타까워하게 될 순간들을.
"……ㄹ……."
"유신, 정신이 드는가?"
한동안 움찔움찔 몸을 뒤척이던 유신의 입에서 채 음성화 되지 못한 말이 새어나와 월야는 그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반쯤 잠들어 있는 무의식으로도 힘겹게 찾고 있는 것은 마른 목을 적셔줄 물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월야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탁자 위의 주전자에서 물을 조금 따라내 유신의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아직 의식이 없는 유신은 흘려준 물을 삼키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망설이던 월야는 곧 제 입속에 나머지 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여 유신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입술 사이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혀 끝을 움직여 바싹 말라있는 유신의 입 안으로 물을 흘려 넣었다. 유신의 목울대가 약하게 울리며 월야가 전해준 물을 삼켰다.
물을 받아 마시고 갈증을 모면한 유신은 또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자신은 이제 겨우 이 감정을 인정할 생각이 들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그는 참으로 월야를 곤란하게 한다. 월야는 쓴웃음을 지은 채 팔을 뻗어 유신의 손을 잡았다. 아직까지 물기가 남아있는 월야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닿은 유신의 손끝은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