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군과의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던 국경의 전선에서 드디어 기다리던 승전보가 서라벌의 왕궁까지 도착했다. 백제군은 점령하고 있던 성을 내준 채, 사비 근처까지 퇴각을 했다고 한다. 근래에 없던 대승, 그리고 유신이 상장군 직함을 달게 된 이후 첫 승전이었다.
전선에서 돌아와 여왕의 앞에 승리를 보고하기 위해 인강전으로 향하는 동안, 유신이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던 길을 멈추고 찬사와 축하를 보내왔다. 유신은 그 찬사 하나하나에 예의바른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공을 세운 개선 장수의 표정 치고는 미묘하게 가라앉은 모습에 모두들 작은 의문을 안게 되었다.
"그런데 늬 장군님, 왜 저렇게 기분이 안좋아 보이는 거냐?"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산탁이 인강전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대풍과 고도를 잡아 끌며 물었다. 그 질문에 어쩐지 핼쑥해지는 둘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아 좀, 왜 그러냐고. 하며 재촉하는 산탁과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둘을 바라보던 죽방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혀를 차다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월야공은 좀 어떠시냐?"
"월야공? 그러고보니 화장군님이 안보이시네."
"상장군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린 장계를 내가 봤지. 서라벌로 돌아오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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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자객들이 쏜 화살에 화장군이 맞았다는 장계는 보았소. 그는 좀 어떠하오?"
"다행이 큰 부상은 아니었습니다. 허나 자칫 화살독이 올라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는 일인지라, 폐하께 함께 보고드리러 오지 못한 것을 부디 해량해 주시옵소서."
여왕은 월야의 부재에 대한 양해를 구하며 고개를 숙이는 유신에게 웃음으로 답을 대신 했다. 큰 부상이 아닌 것이 정말 다행이다. 유신은 아직도 월야가 화살을 맞던 순간을 떠올릴 때 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러야 한다. 애초에 자객들이 쏜 화살은 월야가 아니라 유신을 노린 것이었다. 유신은 자신을 향해 화살이 날아오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판단되는 상황, 그렇다면 부상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고통을 각오했다. 하지만 한순간 차단된 시야로 보이는 것은 익숙한 이의 등이었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을 제 가슴으로 받아낸 월야가 휘청 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만간 축하연을 준비하겠다 하는 여왕의 말을 끝으로 한 채 유신은 인강전에서 물러나왔다. 함께 입궁할 수 있다며 고집을 피우던 월야는 유신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조용히 꼬리를 내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해산과 휴식을 명령하고 그 자신도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는 유신으로서는 뒤에서 병사들이 이제야 해방이라는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월야가 기거하는 별채로 발걸음을 한 유신은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벌컥 방 문을 열었다. 방 안에 있던 월야는 그 기세에 깜짝 놀라 탁자위로 손을 뻗은 모습 그대로 굳은 채 유신을 보고 있었다.
"월야!"
"와…왔는가."
"왜 환자가 누워있질 않고 있는건가!"
"조금 전까지 누워 있었는데 목이 말ㄹ-"
"당장 침상으로 돌아가 눕게."
아니, 물 좀 마시자고, 하는 표정으로 항변하던 월야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유신을 보고 푹 한숨을 내쉰 채 침상으로 돌아가 몸을 뉘였다. 척척 방 안으로 걸어들어온 유신이 작은 그릇에 물을 따라 월야에게 내밀었다. 조용히 그것을 받아 마신 월야는 흘끔 곁눈질을 하며 유신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월야가 유신의 앞을 막아서서 부상을 입은 이후로, 유신은 내내 화가 난 채였다.
"유신, 이제 그만 화를 풀어주면 안되겠나…?"
"……."
"화살에 발라져 있던 독도 무사히 해독했고, 상처도 곧 아물것이라 의원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걸 지금-!"
다시금 월야에게 왈칵 성을 내려던 유신은 월야의 가슴에 매어져 있는 붕대를 보고는 애써 속을 가라앉혔다. 지금도 월야가 화살을 맞던 순간을 떠올리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 때, 휘청이는 월야의 등에 순간적으로 겹쳐지는 것은 그렇게 화살을 맞고 유명을 달리 한 첫 주군, 천명공주의 모습이었다. 그 차가운 동굴 속에서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하릴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 때의 괴로움, 게다가 이번의 상대는 평생 단 하나 뿐이라 정한 정인이었다. 유신은 자신을 올려다 보는 월야의 눈을 외면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한동안 유신이 말 없이 서 있자 따뜻한 손이 유신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침상 위에 걸터앉은 유신은 월야가 꾸물거리며 제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려놓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건가."
"사실 난 말일세, 내가 자네를 대신해 화살을 맞았으니 자네가 밤낮 없이 지극 정성으로 날 간호해 줄 거라고 기대했네. 이렇게 무릎베개도 해주고, 죽도 떠먹여 주고, 약도 떠먹여 주고, 아프다고 엄살 부리면 상처도 어루만져주고."
"…자청해서 다친 이가 뭐가 예쁘다고 그런 수고를 하나."
"그러게 말일세. 다치고도 이렇게 홀대 당할줄 내가 알았나."
하하 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내는 월야는 그래도 말과는 달리 전혀 서운한 기색이 없었다. 자신을 올려다 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어, 유신은 울컥 몰려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유신의 목을 휘감아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한 월야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제 정말 화를 풀어줘, 유신. 걱정 끼쳐서 미안하네."
"다시는…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하지 마."
"노력은 해보겠지만 자네가 또 다시 위험해지면 장담할 수 없겠는걸."
"월야!"
"아아, 지금은 잔소리보단 입맞춤이 더 필요한 때란 말이야."
잔소리는 서라벌로 돌아오는 내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 대풍과 곡사흔이 날 얼마나 불쌍한 눈으로 봤는지 자네는 아마 모를거야. 하고 궁시렁거리며 월야가 고개를 끌어당겨, 유신은 못이기는 척 그 손길에 따랐다. 가볍게 입술에 닿는 월야의 입술은 까슬하게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살짝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유신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월야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많이 아픈가?"
"아니, 자네가 대신해 다 아파해주고 있지 않았는가. 그럼 환자는 다시 한 숨 자야겠네. 깨어날 때 까지 이대로 있어주면 참 고맙겠어."
유신의 무릎을 벤 채로 눈을 감으며 월야가 말했다. 곧 이어 평온한 숨소리가 유신의 귓가에 내려앉으며, 월야의 부상으로 무겁게 짓눌려 있던 유신의 마음을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