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외궁의 문을 빠져나와 수하가 준비해 둔 말에 오른 월야는 말의 배를 차 달려나가기 직전, 짧게 뒤를 돌아보았다. 늘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던 옅은 갈빛의 눈동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지금 이렇게, 이 곳을 빠져나간다면 아마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눈동자였다. 손에 쥐고 있는 검에는 방금 전 벤 신라 병사의 피가 얼룩져 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 끝의 핏방울을 보며 월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럇!」
월야의 재촉을 받은 말이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초겨울의 시린 바람이 월야가 달려가는 방향에서부터 불어와, 세차게 얼굴을 쳤다. 그 때문에 시큰하게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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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는 살아오면서 단 한순간도 가야인이 아닌 적이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실체가 없는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가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하고 무슨 일에도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고 교육받으며 자라왔다. 가야 재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드리워진 이후, 월야는 늘 그러했다. 그 어떤 것도, 멸망한 제 나라 가야에 우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서라벌의 정세는 어떠하냐.」
월야가 서라벌의 사량부를 탈출해 도착한 곳은 새로운 복야회의 거점으로 쓰이던 산채였다. 궁중에 심어두었던 복야회의 간자들은 대부분 사량부에 의해 추포되었지만 아직 서라벌 안에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복야회의 세력이 남아있다. 서라벌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는 수하를 만나기 위해 산채의 정청으로 나온 월야는 그에게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아직 왕자님의 탈출 소식과 저희 복야회의 소식이 궁 밖까지 퍼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량부에서는 여전히 복야회의 세력을 축출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운신이 어려운 이들도 몇 있는듯 합니다.」
「…아직까지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
「네. 아무래도 왕이 함구령을 내린듯 싶습니다.」
수하가 들고 온 소식에 월야는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이것은 신라 왕에게 있어 국가 반란에 버금가는 사태였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는 것,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상장군…, 유신은 어찌 되었다 하더냐.」
「그 역시 궁 안에서 은밀히 진행된 일인듯 하지만, 병부의 대대감 몇명과 함께 추포되어 사량부의 심문실에 갇혀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래…….」
예상했던 일이다. 자신이 사령부를 탈출하면 안그래도 수세에 몰린 유신이 더더욱 곤란해질 것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과 복야회에 씌여진 반역의 죄가 고스란히 유신에게 갈 터였다. 더군다나 이번, 복야회의 새로운 세력이 신라의 왕 앞에 드러나게 된 계기 역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다수 존재했다. 아마도 유신을 향했을 것이 틀림없는 악의적인 함정이다. 그 함정에 빠져 결국 자신은 궁중 안에 구축해두었던 세력을 잃었고, 수많은 피해를 감수한채 그곳을 떠나와야 했다. 그리고 유신을-
「…….」
유신을,
월야의 입가에 스치듯 비웃음이 지나갔다.
무엇을 변명하려 하는 것이냐, 그저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 언젠가는 버리고 나올 것이 아니었더냐. 그의 길과 나의 길이 갈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더냐. 그가 신라 안에서 가야의 왕이 되길 거부한 그 때부터, 해체되어야 했을 복야회를 내가 놓지 못하게 된 순간부터.
꽉 쥔 주먹 안에서 손톱이 아프게 살 속을 파고들었다. 가야를 재건하기 위한 일에는 무엇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장기말은 모두 이용하고, 버릴 때는 정을 두지 말아야 한다. 이미 월야가 그렇게 사용하고, 잃고, 또한 버린 말들이 그의 앞에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안에는 월야를 가야인으로서 자라게 한 스승도 있었고, 마음을 주었던 친우도 있었으며 자발적으로 몸을 바친 수하들도 있었다. 필요하기만 하다면 월야는 그들 뿐만이 아니라 제 한몸 역시 거리낌없이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태어난 생이었고, 그것을 위해 수여받은 왕자의 이름이었다.
누구 하나, 특별한 이가 있어서는 안되는 삶이었다.
보고를 끝낸 수하를 물리친 월야는 몸을 일으켜 창 바깥쪽의 난간에 몸을 기댔다. 높고 험준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복야회의 산채에 부는 바람은 며칠 전, 서라벌을 탈출하며 정면으로 맞부딪친 바람보다는 그 매서움이 덜한 듯 했다. 하지만 한순간, 월야는 뼛속까지 차가운 오한을 느꼈다. 그 날 이후로 머리 한구석에서 박힌듯 사라지지 않는 유신의 눈동자. 마지막으로 그를 안았을 때, 자신의 품안에서 잔잔한 온기를 나누어 주던 몸이 떠올랐다. 그의 몸을 안을 때마다 월야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대로, 자신도 신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착각.
이제 다시는 유신의 온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 눈동자가 애정과 신뢰를 담아 월야를 보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먼저 배신한 것은 이쪽이니, 더이상 미련 두어 무엇할까. 이미 그의 곁에서 그런 착각속에 빠질 뻔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야를 위해 사라진 모든 것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왕자님, 백제 쪽의 사람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알겠다.」
또 다른 소식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에 월야는 쥐고 있던 난간을 놓고 다시 정청의 의자 위에 앉았다. 얼마 전 유신과 월야가 함께 이끄는 신라군에게 대패한 백제군의 움직임이 또 다시 분주해졌다는 보고를 듣는 사이, 짧은 초겨울의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달도 뜨지 않는 그믐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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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디까지 다른 이를 신뢰하고 보듬을 수 있을까. 유신을 볼 때면 월야는 늘 그런 의문을 갖고는 했다. 어째서 저렇게, 한치의 의심도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그간 살아온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은 이가, 어째서 아직까지 저렇게 맑은 눈을 하고 있는가.
유난히도 색소가 엷은 유신의 눈이 월야를 보고 빛으로 차오를 때, 그때의 월야는 자신이 유신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애썼다. 아직 놓을 수 없다고, 버릴 수 없다고, 차근차근 서라벌의 중추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는 서라벌 내에서 복야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이용가치가 있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변명을 했다. 쓸모가 있기에 놓지 않는 것이지, 잃고 싶지 않기에 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늘 스스로에게 말해왔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자기기만이었던가. 갑작스럽게 예정에 없던 일로 그를 배신하게 된 지금에서야 월야는 자신의 비겁함을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신라의 왕이 그를 결코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뿐. 그조차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복야회의 일을 함구에 부쳤다고 하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일이었다.
정말 이것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겁한 자기위안이 아닌가. 내 손으로 그에게 씌운 굴레를 신라의 왕이 벗겨주길 바라다니, 네 아무리 오랜시간 두 마음을 먹고 그를 대해왔다고는 하나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열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온 몸이 활활 불 타 내장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에 월야는 빠르게 산채의 안뜰 중앙에 있는 우물을 향해 걸어갔다. 우물의 물을 길어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것을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부었다. 뒤따라 온 수하들이 경악에 질린 채 월야를 불렀지만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이후에도 몸을 태우는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게 찬물을 맞은 채 남은 열기를 내보내듯 숨을 고르는 월야의 앞에 조금 질린 얼굴의 수하 하나가 부복을 했다.
「무슨 일이냐.」
「서, 서라벌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보고 드릴 일이 있다고…….」
「예서 듣겠다. 말하거라.」
서릿발같이 꽂히는 월야의 말에 잠시 우물쭈물 하던 수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월야에게 말을 전했다.
「서라벌에 방이 붙었습니다. 복야회의 간자들과 그들에게 협력하는 모든 이들을 잡아들이겠다 하는 사량부의 추포령이라 합니다. 복야회와 연관이 없는 가야인들에겐 다른 피해가 없을 것이나 반란 세력과 연관한 것으로 보이는 상장군 김유신은 유배형에 처한다 하는…….」
보고를 들은 월야의 입에서 가늘게 웃음소리가 새어나와 어느새 안뜰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울려퍼졌다. 발 밑으로, 아슬아슬하게 딛고 있던 반석들이 하나씩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결국, 그렇게 신명을 다해 충성을 바치던 왕에게도 버려지는가. 내가 자네를 버렸는데, 나의 배신으로 인해 자네의 왕마저 자네를, 그렇게.
누구도 월야에게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웃음을 그친 월야는 주변을 향해 말을 끌고 오라 외쳤다. 말을 끌고 오너라, 서라벌로 갈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수하들이 월야의 앞에 무릎 꿇으며 불가함을 말했다. 하지만 월야는 그들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쉴 새 없이 말을 달려 도착한 서라벌의 저자에는 이미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나라의 병권을 대표하는 상장군이 반역의 무리들과 결탁을 한 죄로 유배를 떠난다 한다. 그는 며칠 전 까지만 하더라도 서라벌의 백성들에게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전보를 가져다 주던 그런 이였다.
저자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짙은 배신감이 깃든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스며든 월야는 깊게 눌러쓰고 있던 삿갓의 끝을 조금 들며 멀리, 저자의 길 끝을 응시했다. 느리게 행군하는 군사들의 사이로, 익숙한 인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질 때 마다 월야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 와서, 이런 변명은 할 수 없겠지만 그 거짓된 시간들, 거짓된 맹세들 속에서도 어느새 마음만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이 진심이 되어 있었다. 무엇 하나 예외를 둘 수 없는 황폐해진 마음 안에, 애정어린 눈동자 하나가 특별이 되어서, 그런데도 나는 그 눈동자 하나만을 품고 있을 수는 없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도착한 그는 그다지 애쓴 흔적도 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금 가는 그 길이 억울할 법도 한데, 치욕스러울 법도 한데. 월야는 조금 더 자세히 그를 보기 위해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면 병사들 중 누군가가 월야를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이듯 하는 것을 어쩔수는 없었다.
「유신….」
바로 옆의 사람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무의식이었다. 그런데 정면만을 바라본 채 병사들에게 끌려가던 그가 마치 그 부름을 듣기라도 한듯 월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찰나간의 마주침. 지쳐있던 갈색 눈동자가 한순간의 놀라움 끝에 익숙한 온기를 품은 빛으로 변하였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까지 자네는 나를 향해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건가. 내가 자네를, 지금의 이 수렁텅이로 밀어넣었는데. 끝내 나는 자네의 사람이 될 수 없었는데 어째서.
먼저 고개를 돌려버린 것은 월야였다. 정신없이 인파를 헤치고 달렸다. 말을 매어둔 산길의 초입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떨려와 월야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꽉 막힌듯한 목에서 짐승소리같은 울림이 새어나왔다.
나는 결코 신라인으로 살 수 없어. 그렇게 사는 법은 나에겐 존재하지 않아. 나는 모두가 신라인이 된 순간에도 마지막 가야인으로 남아야 하는 망국의 망령이다.
그런데 유신, 자네는 나를 가야인으로도 살 수 없게 해.
월야는 한 손으로 오열이 새는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짙은 원을 그렸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바싹 마른 낙옆과 함께 휘몰아쳐 올라가는 하늘에는 희미한 낮달이 바랜 빛으로 스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