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덕질/삼국지 촉
相思夢
相思夢
1. 夢中夢
달도 별도 제각각 빛을 내는 밤이었다.
성 위에서는 늘 먼저 시선을 아래로 내려야 했다. 성벽 아래로 흙먼지가 이는 땅, 듬성듬성 솟은 메마른 관목과 야트막한 구릉을 달빛에 의지해 희끄무레한 시선으로 쫓다 보면 아주 멀리 새까만 숲의 그림자에 도달했다. 하늘의 경계는 숲의 꼭대기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밤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것을 보니 내일도 맑겠습니다."
여상스럽게 건넨 말에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성곽까지 조용히 공명을 따라오던 사람의 것이었다. 공명이 혼자서 밤 산책을 하다가 간자로 오인당해 험한 일을 겪을 뻔한 이후부터 유비의 명에 의해 동행하게 된 그는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단숨에 앞을 막아설 수 있는 다섯 보 안쪽, 느긋한 공명의 걸음걸이에 속도를 맞추어 늘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공명을 따라오고 있었다. 처음엔 병사 몇 명만 호위로 딸려 보내도 될 일에 굳이 그 정도 되는 지위의 무관이 직접 동행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을 위한 배려임을 알아차렸다. 무엇보다 아직 이곳 신야엔 흰 눈을 뜨고 공명을 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혹시라도 다시 그런 이들과 마주쳐 얼토당토 않은 시비가 붙는다면 병사들만으로는 수습하기 힘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씁쓸하지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말없이 동행하는 그가 더욱 고마웠다.
하지만 어차피 함께 가는 길이라면 나란히 걸어주어도 좋으련만.
"한동안 맑은 날씨가 이어져 참 다행이지요."
대답은 없었다. 워낙에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서운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공명이 이 산책길에서 그에게 먼저 곁을 청하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그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유비를 섬긴 이였다. 지금 이렇게 속 깊은 배려를 해 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공명에 대한 반감이 없을 것이라 단정할순 없었다. 신야 사람들의 불신 섞인 시선과 반발은 이미 각오한 일이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결국엔 그들이 저를 인정하게 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묵묵히 감내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렇기에 그의 배려가 단순히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으면 했다. 곁을 청했을 때 그가 거절한다면 서운함과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것 같았다.
너무 일찍 약한 소리를 하는구나, 하고 쓴웃음 지으며 올려다본 밤하늘엔 달도 별도 밝았다. 공명이 신야성 주변의 세세한 지형지물을 어둠 속에서도 떠올릴 수 있게 될 때까지 이 산책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때마다 매번 이렇게 고민할 것인가. 그렇다면 약한 소리로 투정을 부리는 대신 조금쯤 용기를 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떠올렸다. 그가 공명의 청을 수락해 다섯 보를 좁혀준다면 앞으로의 산책길에 진짜 동행을 얻게 될 것이다. 혹시라도 거절한다면 그땐 조금 더 인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얻을 것은 크고 잃을 것은 없었다.
공명이 오랜 시간을 망설이는 동안에도 그는 묵묵히 뒤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등 뒤의 시선을 느끼며 공명은 눈을 감고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이제 그에게 말할 것이다. 뒤에서 제 등만 바라보지 마시고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은 어떠십니까, 라고. 그렇게 결심을 굳히자 웅성거리던 마음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뒤를 돌아 그 말을 전하고 나면 그는 조금 놀란 눈빛으로 공명을 볼 것이다. 의외라는 듯 당황한 표정. 하지만 거절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것을 읽어내고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혹시 제가 뒤를 지키는 것이 저어되십니까? 하는 조심스럽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발끈한 마음이 들어 '그런 것이 아니고…!' 항변하듯 시작하여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오간 긴 대화들, 그리고 그가 다섯 걸음을 좁혀 마침내 어깨가 나란히 서던 그때.
"……."
성벽을 짚고 있던 공명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끼고 문득 내려다본 자신의 손은 스물일곱, 젊디젊은 서생의 손이 아니었다. 바싹 말라 손가락 마디가 두드러진 나이 든 손. 지금의 나는 주공을 따라 갓 출사한 젊은 군사가 아니다. 그렇게 인식하자마자 그때 당신에게 곁을 청하길 참으로 잘하였다고 늘 웃으며 이야기하던 기억들이 순차적으로 펼쳐졌다. 순식간인 것도 같았고 천천히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것도 같았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나는 또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여전히 공명은 그때의 신야성을 세세한 곳까지 눈앞에 펼쳐놓을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그와 함께 일 년 가까운 시간을 줄곧 걸었던 곳이다. 생에 가장 위안이 되는 동행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시간이 아무리 지났다 한들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왜 다시 제 뒤에 서 계시는 겁니까."
한숨 같은 밤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쳤다. 여전히 등 뒤에선 대답이 없었다. 이제는 돌아봐 곁을 청한다 한들 눈을 뜨면 없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이 나았다. 그의 목소리에 취해 마냥 꿈속을 거닐기에는 잠에서 깨어 할 일이 많았다.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단단했던 성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풍경들도 하나둘씩 사라진다. 눈을 떠 바라본 하늘에는 달도 별도 빛나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발걸음 소리 역시 더는 들리지 않았다.
2. 夢境
"……."
"승상!"
그저 눈을 떠 손끝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그 기척을 기민하게 알아챈 강유가 침상 곁으로 다가와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또 의식을 잃었던가. 아직도 머릿속엔 먹먹하게 안개가 낀 듯 생각이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숨을 내쉰 공명은 가장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신야성. 그 밤. 또다시 그 꿈을 꾸었구나. 손을 들어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정신을 차리려는 사이 강유가 미리 준비해놓은 탕약을 가져왔다. 이미 백약이 무효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습관처럼 약을 받아 들이켰다. 적어도 통증의 주기를 늘려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는가?"
"두 시진쯤입니다. 탕약을 드셨으니 조금 더 쉬셔야 합니다."
강유는 공명이 일어나 다시 집무를 보기라도 할까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한동안 누워있었으니 쉴 만큼 쉰 셈인데 걍유는 늘 그것은 통증 때문에 의식을 잃은 것이지 제대로 쉰 것이 아니라며 성화를 했다. 하지만 공명에겐 그 두 가지가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렇게 꿈까지 꾸고 일어난 뒤라면.
최근들어 꿈이 더욱 빈번해졌다. 그가 죽은 직후부터 간간이 꾸던 꿈이었다. 매번 꿈속에서 공명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 꾸어도 좋으련만, 쓴웃음이 지어지려는 것을 삼켰다. 한동안은 그 꿈을 꾸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공명이 다시 그 꿈길에 찾아들기 시작한 것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마지막이 성큼 다가온 것을 느낀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충동이 점점 강해졌다. 돌아서서 그를 부르고 싶다는 충동. 신야성의 풍광만큼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충동.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것인데도.
명치 부근이 다시 답답해졌다. 어차피 강유가 지키고 서 있는 한 일을 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다시 눕고 싶지 않았다. 막사 안에 완전히 밴 쓴 탕약 냄새도 싫었다.
"두 시진을 누워있었다면 이제 슬슬 둔전을 하던 병사들이 돌아올 시간이겠군."
"해가 지고 있으니까요."
"사륜거를 준비해주게."
"승상!"
"이곳이 답답해서 그렇다네. 맑은 바람 정도는 쐬고 쉬어도 될 일 아닌가."
공명이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을 안 강유는 마지못해 사륜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종들을 불러 공명에게 무거울 정도로 두텁게 겉옷을 입힌 후 직접 사륜거를 밀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서쪽에서부터 붉어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위수에서 불어오는 늦가을의 강바람이 제법 차가워 공명은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찬바람을 맞자 금세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다시 막사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병영 안은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화덕에 솥을 걸고 저녁을 짓던 병사들은 공명의 사륜거가 지나갈 때마다 엎드려 절했다. 이곳 오장원에 진을 치고 위군과 지루한 대치를 시작한 지 백 일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병사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제 위치를 지키고 있다. 여인들이 입는 옷까지 보내 가며 사마의를 도발해 보았지만 위군은 군문을 굳게 닫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을 동안 사마의가 움직여주면 좋으련만. 언제라도 출전할 수 있을 것처럼 질서정연한 병영 상태를 보며 공명은 또 다시 구토가 치밀 것처럼 속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조만간 군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군이 아닌 철군. 양의와 비의, 강유, 위연, 마대 각각의 사람들과 여러 가지 생각이 산발적으로 튀었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것인지 사륜거를 밀던 강유가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걸었다. 아직 병사들의 눈이 많았다.
"난 괜찮네."
손을 들어 지긋이 명치 위를 눌렀다. 날카롭던 통증이 조금 둔해졌다. 강유는 서둘러 사륜거를 오던 길로 돌리려 했다. 병영을 조금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번엔 고집을 부린다 한들 들을 것 같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둔전을 마친 뒤 농기구가 든 수레를 끌고 병영 안으로 들어오는 군사들을 만난 것은 공명의 사륜거가 방향을 바꾼 직후였다. 둔전의 감독으로 나가 있던 교위 하나가 공명과 강유를 발견하고는 급히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인가. 둔전에 문제라도 생겼는가?"
막사로 돌아가려는 길에 잡힌 걍유의 목소리가 조급했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그 서슬에 교위가 고개를 조아리며 고했다.
"둔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단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강기슭에 사람이 하나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했사온데 아무리 보아도 근처의 양민 같지는 않아 보여서 일단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근처의 양민이 아니다?"
"예. 차려입은 행색도 그러하거니와, 소지하고 있던 무기 역시 그저 의장을 위한 장식품은 아니었습니다."
공명은 강유가 교위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둔전병들이 끌고 온 수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레 바깥으로 사람의 발 하나가 빠져나와 있었다. 가죽을 덧댄 신이 닳아있는 상태를 보니 무예를 익힌 사람이 확실했다. 교위의 말대로 근방의 농사꾼이거나 양민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군의 병영에 침입했다가 돌아가려 했거나 혹은 새로이 침입하려던 위의 세작일까? 공명이 기억하는 한 위의 세작을 발견했다는 보고나 추격은 없었다. 정체가 발각되어 쫓기는 상황도 아닌데 세작 주제에 물에 빠져 정신을 잃고 적에게 발견된다? 어지간히 덜떨어진 인사가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허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쪽으로 끌고 오너라."
그를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공명이 내린 명령에 병사들이 수레를 끌고 사륜거 가까이 왔다. 사륜거에 앉아있던 공명보다는 서 있는 강유의 시선이 더 먼저 그에게 닿았다. 수레에 실려 있는 사람을 본 강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내 공명의 시야에도 수레 안의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누어있는 모습으로만 보아도 상당히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힘없이 늘어진 손 안쪽에는 무기를 다루며 생긴 굳은살이 잔뜩 배어 있다. 공명은 직접 창칼을 손에 쥐고 휘둘러본 적은 없지만, 평생 무기를 다뤄온 사람의 손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었다. 가는 숨을 내쉬느라 작게 오르내리는 가슴께를 지나 곧게 뻗은 턱부터 시작해 찬찬히 이목구비를 살폈다. 저도 모르게 버릇처럼 학우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순간 심장 소리가 크게 귀를 울렸다. 물에 빠져 파랗게 질려있는 얼굴은 상당히 앳되지만, 어딘가…….
"승상!"
익숙한 고통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진 공명은 몸을 숙이고 가까스로 손을 들어 머리를 지탱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그 얼굴이 지나치게 익숙하다.
"승상, 정신을 차리십시오, 많이 고통스러우십니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려댔다. 늘 의식 한구석에 머물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조금 저으려 하는 것만으로도 구토가 몰려올 만큼 현기증이 일었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 꿈속에서는 언제나 뒤돌아 당신을 보고 싶었지만, 끝끝내 그리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지금, 저리도 닮은 사람이 이곳에.
"소란…피우지 말라…."
숨을 몰아쉬느라 말이 끊겼다. 가까스로 강유의 팔을 붙잡은 공명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네, 승상."
"정체가 밝혀지기 전… 까지는, 그 존재를… 함구……."
거기까지 겨우 말을 내뱉은 공명은 통증 때문에 터지려는 신음을 참기 위해 힘껏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의식이 까무룩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강유의 부름이나 병사들의 움직임도 멀어졌다. 이번에도 또 그 꿈을 꾼다면 그것이 꿈임을 자각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뒤돌아 볼 것 같았다.
**
강유는 눈앞에 놓인 물건들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정신을 잃은 청년의 몸을 수색하여 찾아온 소지품들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실전에 쓰이는 장검이 한 자루, 호신용으로 보이는 단도가 한 자루, 노자로 썼을 법한 은 조각들이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 그리고 호패가 전부였다. 지나치게 단출하지만, 이 소지품들로 보아서는 떠돌아다니는 무인에 딱 어울리는 행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시국에? 비록 군사들끼리 맞부닺쳐 전투가 일어나진 않았다고 하나 벌써 석 달째 위수를 사이에 두고 촉한과 위가 대치하고 있는 것을 중원에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국운을 걸고 두 나라가 대치 중인 곳에 풋내기 하나가 물정 모르고 어슬렁거린다? 변명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가도 억울해하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강유는 손을 뻗어 청년의 호패를 집었다. 새겨져 있는 글자는 중평(中平) 3년, 기주 상산, 그리고 강유 역시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처음 정신을 잃고 있던 청년의 얼굴을 보았을 때 느낀 기시감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선뜻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 더 기억을 더듬으려 하다가 공명이 다시 혼절하는 통에 그대로 잊어버렸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확실히 그 사람을 닮아있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그의 부름에 막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들어왔다. 임시로 만든 옥사에 가두어 둔 청년은 이미 정신을 차렸다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직접 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추측은 상산에서 온 그의 친족일 수도 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혼자서 판단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이곳으로 등 장군과 마 장군을 은밀하게 모셔 오너라. 그리고 그자도 끌고 오도록."
명을 받든 병사가 막사를 나갔다. 등지와 마대보다는 강유의 막사 바로 옆에 갇혀 있던 청년이 먼저 끌려 들어왔다. 손에 수갑이 채워진 것을 제외하면 몸을 구속하는 것은 없었다. 크게 반항할 생각은 없는 듯 고분고분 끌려온 청년은 병사들이 어깨를 짓누르자 마지못해 무릎을 꿇었다. 강유는 다시 한 번 찬찬히 청년을 살펴보았다. 물에 빠졌다 건져진 뒤 따로 몸을 정리할 틈이 없었기에 추레한 모양새였지만 움츠러듦이 전혀 없는 태도는 오히려 당당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청년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본 강유는 그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잇소리를 냈다. 청년의 호패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는 누구인가."
강유가 청년을 향해 물었다. 그 한마디가 이렇게 무겁게 나올 줄은 강유 자신도 몰랐다. 강유의 물음을 들은 청년은 그의 손에 쥐어진 제 호패를 흘끔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조운. 기주 상산 사람이오."
막사 안으로 등지와 마대가 들어온 것은 청년이 대답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청년의 대답을 듣고 반사적으로 굳어진 마대와 다르게 등지의 행동은 빨랐다. 한달음에 청년의 앞까지 걸어온 등지는 그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턱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청년은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지금 등지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등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드는 사이 청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움직여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조운이라고? 네가?"
"저쪽에 있는 이가 이미 몸수색을 끝내고 모든 소지품을 가져갔소. 보아하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내 호패인 것 같은데 호패까지 빼앗긴 이상 본명이나 출신을 속일 이유가 없질 않소."
그 말에 등지가 강유의 곁으로 다가갔다. 강유는 등지에게 청년의 호패를 건네주었다. 그 사이 청년에게 다가온 마대가 다시 청년을 유심히 살폈다. 마대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혹시 집안 어르신 중 자네와 같은 이름자를 가진 분이 계시는가? 오래 떨어져 있어 뵙지 못한 분들까지 포함해서."
"그런 것까지 묻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에는 없소."
청년의 대답에 마대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마대 역시 가장 쉽고, 또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추측을 한 것이었다. 청년은 그들이 알고 있는 조운과 전혀 상관없는 동명이인이라기엔 일단 생김새부터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마대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진 사이 등지는 강유에게서 건네받은 청년의 호패를 살폈다. 중평 3년.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쯤 전에 쓰던 연호였다. 이 호패가 진짜 청년의 것이라면 그는 지금 이순을 넘긴 노인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청년의 연배는 아무리 잘 봐주어도 이립조차 되지 않은 애송이였다. 문득 등지의 머리속에 오 년 전 죽은 조운의 나이가 스쳐 지나갔다. 호패에 새겨진 연호는 죽은 조운의 연배에 딱 맞는 시기였다.
"새파란 애송이가 방자하구나. 감히 외모가 조금 비슷한 것을 빌미로 호패를 조작하고 이런 얼토당토않은 거짓을 말하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조작이라니. 그것은 내 호패가 맞소. 당신들이야말로 더는 무고한 이를 잡아두지 말고 날 놔주시오. 보아하니 이곳은 군진 같은데 당신들이 누구의 군이고 또 어떤 이와 대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나는 그저 양주로 향하던 길일뿐이니."
"닥쳐라. 우리가 저 역적 조위를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진을 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태평하게 양주로 가려던 참이었다고? 전장 한복판을 지나서?"
"한의 백성이 한나라 땅 중 가지 못할 곳이 있소? 게다가 전장이라 한다면 전란을 겪지 않는 땅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을."
청년은 등지의 호통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말을 맞받아쳤다. 강유는 청년이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닮은 외모를 이용한 조작이라면 조금 더 그럴싸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이 나았으리라. 저런 젊은 외모로 내가 육십 년도 더 전에 태어난 조운이라고 우기는 것 보다는 믿을 수 있을만한 이야기로. 강유가, 또 마대가 했던 가장 쉬운 추측대로 청년이 기주에서 온 조운의 친족이라고 했다면 그들은 오히려 그 말을 믿었을 테고 동시에 위나라의 간자로 의심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자로 의심받는 것을 피하기 위함일까? 하지만 조금 전 저 청년은 자신을 한의 백성이라 지칭했는데? 한의 백성이 한나라 땅 중 가지 못할 곳이 없다며 위의 영토인 양주를 간다? 강유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도무지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머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마대가 크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양주를 가려 했다는 말에 기가 찬 것일 수도 있다.
"정말 자네가 기주 상산에서 온 조운이라면, 혹시 자(字)는 자룡을 쓰는가?"
다시 청년에게 물음을 던진 사람도 마대였다. 그 물음에 청년은 이곳으로 끌려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계의 색도 한층 짙어졌다. 그 반응을 본 세 사람의 미간에 더욱 깊은 골이 파였다. 등지가 강유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승상께서는 알고 계시오?"
"저자의 얼굴은 보셨습니다. 하지만 직후에 다시 의식을 잃으신지라. 정체를 밝힐 때까지 함구하라 하신 것을 보니 이미 저자가 돌아가신 조 장군을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신 듯합니다."
"그야, 우리조차 단번에 알아챌 만큼 똑같은데 그분께서 눈치 못 채실 리 없겠지."
이제는 등지조차 청년을 바라보는 눈빛에 혼란이 깃들었다. 한의 백성이 한나라 땅 중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느냐는 청년의 말은 지금은 통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과 죽은 조운이 딱 저 청년 정도의 연배였던 시절엔 가능한 일이었다. 전란이 나라 곳곳을 휩쓸었지만 어쨌든 한이라는 하나의 나라 안이었고 국경이 나뉘지도 않았던 때.
"이제는 이런 것마저 승상께 떠넘겨야 하는가. 하지만 강 장군, 난 모르겠소."
"등 장군."
강유는 등지가 조운의 부장이던 시절 제 상관을 얼마나 경애했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지간한 일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등지가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어느새 마대와 승강이를 벌이는 청년을 보며 강유는 병상에 누워있을 공명을 떠올렸다. 결국 공명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새벽녘에 눈을 뜬 공명에게 강유는 조용히 호패 하나를 넘겨주었다. 공명은 호패에 새겨진 글자를 더듬었다. 오래전 조운이 이것과 똑같은 호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침상에 앉은 공명의 앞으로 불려 온 청년은 눈이 가려진 채였다. 아직 간자가 아니라 판명 난 것이 아니니 진영 안에서 승상의 막사까지 가는 길목을 함부로 보게 둘 수 없다는 등지의 주장 때문이었다. 청년은 이 처사에 반발했지만, 여전히 큰 반항은 하지 않았다. 괜한 반항을 하여 몸이 상하는 것을 경계하는 듯했다. 병사들에게 어깨를 눌려 무릎을 꿇는 청년의 입은 익숙한 모양으로 굳게 다물려있었다.
공명은 저 고집스러운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지며 웃는 표정을 유독 좋아했다. 꿈은 꾸지 않았다. 진정 젊은 그가 내 앞으로 온 것일까. 비현실적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정말 정신마저 흐려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공명은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몇 번의 헛기침으로 감추어야 했다.
"눈을 풀어주게."
그 소리를 들은 청년이 튕기듯 몸을 일으켜 공명에게 다가가려 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반사적으로 칼을 뽑은 강유가 공명의 앞을 막아섰고 마대가 칼집을 들어 그대로 청년의 등을 후려쳤다. 반쯤 일어서있던 청년이 비틀거리는 틈에 누군가가 종아리를 걷어차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대는 여차하면 청년을 베어버릴 기세로 칼을 뽑았다.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청년이 낭패했다는 듯 입술을 사려 물었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은 막사 안에 등지의 노기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네놈, 역시 승상을 노리고 온 놈이로구나. 사마의가 보냈느냐?"
"아니오."
"그분을 닮은 얼굴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승상께 접근하려 한것이 아니냐."
"어제부터 계속 누군가를 닮았다 말하는데 그게 누군지 난 모르오. 당신들이 어디의 군인지도 모르는데 누구를 노리고 말고 할 턱이 없지 않소. 애초에 나를 이 병영 안으로 들인 것도 당신들인데!"
자신을 항변하는 청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등지가 몸을 낮춰 청년의 멱살을 잡았다. 눈이 가리고 손이 묶인 청년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등지에게 딸려왔다.
"모른다고? 우리가 역적들을 처단하고 한 황실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 벌써 수년이다. 제위를 찬탈한 위에서조차 우리의 대의를 모르는 이가 없거늘, 감히 모른다는 말로 잡아떼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깃발을 내걸고 거병한 부지기수의 이들이 모두 대의를 입에 담았지. 그 중 진정 한 황실을 위하는 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청년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일들 때문에 공명은 오히려 조금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청년의 말투에는 숨기지 않은 냉소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청년이 말하는, 힘 있는 자들이 대의를 핑계 삼아 군사를 일으키던 시절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등 장군. 그만 그를 놓아주게."
청년은 여전히 등지에게 멱살이 잡혀있는 와중에도 공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으로 눈이 가린 채였지만 공명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등지가 마지못해 멱살을 놓자 청년은 처음 끌려왔을 때처럼 무릎을 꿇은 채 자세를 바로 했다.
"눈 가린 것을 풀어주십시오. 조금 전에는 놀라서 그랬지만 다시 경거망동 하지 않겠습니다."
청년이 다시 침착함을 되찾은 말투로 공명을 향해 요청했다. 여전히 공명과 청년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강유가 동의를 구하듯 공명을 뒤돌아보았다. 공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을 칼집에 갈무리 한 강유가 청년에게 다가가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주었다. 입매만으로도 충분히 그려낼 수 있었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닮은 사람 따위가 아니다. 분명 그의 젊은 얼굴이었다. 눈이 부신 듯 잠시 눈가를 찡그리던 청년이 곧 시선을 들어 공명을 마주 보았다. 스물넷, 스물다섯쯤 되었을까. 공명이 기억하는 그와 비교한다면 앳될 정도로 젊은 모습이다. 공명은 조운이 저 나이쯤 되었을 때 한의 정국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보았다. 서로는 동탁의 잔당들이 천자를 인질처럼 잡아 핍박하며 서로를 물어뜯었고 북에서는 원소와 공손찬이 대치 중이었다. 또한, 공명이 조조의 군사들을 피해 고향인 서주를 떠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황실의 권위는 도적들의 손에서 놀아나고 중원 곳곳에서 전란과 학살이 자행되었으니 그가 군웅들의 거병을 입에 담으며 그들을 부정할만한 그런 시기였다.
"여기 있는 강 장군에게 미리 이야기는 들었네. 양주로 가는 길이었다고."
"그렇습니다."
"기주 사람이라 들었는데 어찌하여 그 먼 양주까지 가려 하는가? 그곳 역시 전란을 피하기엔 안전한 곳이 아닐 텐데. 기주 근처에서 원본초와 공손백규가 대치하고 있다 하지만 원본초가 쉽게 밀릴 위인은 아니지 않나."
공명의 물음에 청년보다 더 놀란 것은 등지와 마대였다. 원본초와 공손백규라니, 그것은 청년이 제 신상에 대해 하는 말을 믿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 오래된 이름들을 입에 담은 공명이나 물음에 직접 대답해야 할 당사자인 청년은 태연하기만 했다.
"전란을 피하고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내가 자네를 판단할만한 근거는 그것밖에 없네."
공명의 말에 청년은 탐색하듯 공명을 바라보았다. 경계심 어린 그 눈빛은 공명에겐 퍽 생소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공명이 유비를 따라 갓 출사한 때에도 공명을 경계하지 않고 지켜봐 주던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마음 한구석에 슬그머니 피어나는 서운함을 가라앉히며 공명은 청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짧은 침묵 끝에 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주, 고향에는 사정이 있어 돌아가지 못합니다. 집을 떠난 이후부터 줄곧 떠돌았는데 발길이 닿는 곳곳 폐허가 아닌 곳이 드물더군요. 그렇다면 전란이 이미 휩쓸고 지나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 대신, 전란의 한복판을 찾아가 보자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째서인가?"
"입으로만 떠벌리는 대의는 믿을 수 없고 폐허뿐인 곳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먼 창칼이 날뛰는 곳에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아비규환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다만 몇이라도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명은 그 같은 대답을 예전에 또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목적 없이 떠도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땐 저 역시 제 신념이 한 번 실패한 것을 이유로 어쩔 줄 모르고 갈 길을 못찾는 애송이였으니까요. 하고 덧붙인 말에는 그답지 않게 멋쩍은 기색마저 묻어 있었다.
이 이상 또 어떤 확인이 필요할까. 사실 공명은 청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그가 조운임을 알아보았다. 지금 이 대면과 질문은 자신에게 조금 더 확신을 주기 위한 사족에 불과했다. 애초에 더 현실적일 수 있는 다른 모든 가능성은 신기하리만치 묻혀버렸다.
"강 장군, 그의 수갑을 풀고 이것을 돌려주게."
공명은 옆자리에 시립해 있던 강유에게 소매 속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청년을 이곳으로 끌고 오기 전 강유가 가져다준 청년의 호패였다. 머뭇거리며 그것을 받아든 강유가 청년에게 다가와 수갑을 풀고 호패를 돌려주었다.
"의심이 풀렸으니 이제 이곳을 떠나도 되겠습니까?"
청년의 질문에 공명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그 꿈속에서 뒤돌아 그를 보지 않은 것이 순전히 자신의 의지였음이 떠올랐다. 이것은 꿈이고, 뒤돌아보아 봤자 눈을 뜨면 없을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던가. 하지만 지금 눈앞의 청년은 꿈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안되네."
공명의 대답을 들은 청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을 욕심이라 해도 좋고 미련이라 해도 좋았다. 처음 그 성벽 위에서도 그는 공명의 요청대로 다섯 걸음을 좁혀주었다. 그러니 그때처럼 조금 억지를 부리더라도 이해해주었으면 했다.
"비록 자네에 대한 의심을 푼다 해도 난 이 군의 총책임자일세.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생각해야 해."
"저를 어쩔 생각이신 겁니까."
"구속이나 감금은 없을 것이네. 대신 여기 강 장군이 자네의 신병을 맡는 것으로 하지."
그 말에 나머지 사람의 얼굴에도 덩달아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조만간 군 전체가 이동하게 되면 그때는 떠날 수 있게 해주겠네. 그것만은 꼭 약조하지."
공명의 약조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불신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게선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차가운 시선이었다. 공명은 저도 모르게 청년과 마주쳤던 눈을 피했다. 그만 나가보라 명하는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공명의 명에 가장 먼저 막사를 나간 것은 등지였다. 마대는 잠시 머뭇거리며 공명과 청년을 번갈아 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유가 마대를 향해 청년을 함께 데리고 나가달라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마대에게 이끌려 나가는 청년은 한껏 화가 난 듯 기세가 흉흉했다.
"승상."
"자네도 그만 나가보게."
오한이 이는 듯 어깨에 두르고 있던 겉옷을 여미는 공명의 손끝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유가 다가가 도우려 했지만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막았다. 강유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췄다.
"승상, 이것만은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그가 정말 조 장군인지…."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맞네."
강유의 말을 자르고 나온 공명의 대답은 절박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를 자신에게 맡기는 것인가 물으려 했지만 힘겹게 침상을 짚은 손가락 위로 물기가 번지는 것을 보고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청년, 조운이 공명의 명령으로 병영 안에 억류된 지도 어느새 사흘이 지났다. 지난 사흘간 신병을 책임진 강유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소일거리조차 없이 지내는 그는 퍽 무료하게 보였지만, 쓸데없는 의심은 사고 싶지 않은 듯 일체의 단독행동은 삼가고 있었다.
"신중하다면 신중한 행동이겠지만, 거 참 저렇게까지 경계하면 이쪽이 나쁜 놈 같지 않나. 날 세우는 것이 보통이 아니야. 저이도 나이를 먹으면서 성격이 유해진 모양이네."
사흘째 조운의 동향을 살피러 온 마대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마대는 강유가 한숨을 내쉬자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힘내라는 듯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강유가 촉에 귀순했을 무렵 조운은 이미 군의 정점에 서 있던 무인이었다. 지위로 보나 연배로 보나 강유가 편히 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비록 지금 저 청년이 '그' 조운은 아니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 조운이 아니기에 강유는 더욱더 청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그를 장군이라 칭할 수도 없었고 자나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도 껄끄러웠다. 그래서 강유와 조운 사이에는 조운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 대화가 시작되지 않았다. 그조차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멀쩍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옆모습에 군의 훈련을 참관하던 노장의 모습이 겹쳤다. 강유 역시 공명과 조운이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늘 자신을 채찍질하듯 한 치의 틈도 없이 공무에 매진하던 승상이 잠시나마 편한 낯을 하던 곳이 바로 조운의 곁이었다. 모든 불가능의 가능성을 떠나 그가 조운과 동일인임을 인정하고 나니 조운과 지냈던 기간이 길지 않은 강유조차 그에게서 더 나이 든 예전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승상께서는 아직도 저이를 따로 부르지 않으셨나?"
"저분께서 의식적으로 제 시야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으시니 승상께서 저를 찾으실 때 대부분 함께 움직이기는 합니다만, 저분은 불필요한 의심은 피하고 싶다면서 승상이 계신 내실까지 들어오진 않으십니다. 그래서 승상께 따로 저분을 청할까도 여쭈어보았지만……."
"뭐라고 하시던가?"
"그냥 되었다고 불편한 일 없이 살펴드리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쉬운 일이 없구먼."
마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투덜댔다. 한동안 무심한 눈길로 병사들의 훈련을 바라보고 있던 조운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첫날 가르쳐주지도 않은 제 자를 입에 담은 마대를 특히 경계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어쩐지 더 냉랭하게 굳는 표정에 마대가 쯧쯧 혀를 찼다.
"뭐, 난 승상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내가 조 장군 생전 그이와 친분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진 않거든. 그러니 나름 반갑기까지 한 이 상황에서 돌아오는 것이 저렇게 날 선 반응이라면 억울하지 않겠나. 모르긴 몰라도 등 장군이 기를 쓰고 저 이를 피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걸세."
등지는 그날 공명의 막사를 나온 뒤 제 부대 안에 틀어박혔다. 이 사흘간 등지가 맡은 부대의 훈련 강도가 갑자기 높아졌다는 말도 들렸다. 그 부대는 조운이 죽기 전 직속으로 거느리고 있던 부대였다. 그렇게 얘기하는 마대의 말투에는 숨기지 않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이쪽에서 혼자 애틋하면 무얼 하나. 저이는 아무것도 겪지 않았으니 떠올릴 기억도 의미도 없을 텐데."
"마 장군."
공명은 강유가 조심스럽게 조운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물끄러미 그가 서 있을 휘장의 바깥을 응시했다. 만나서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말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할 텐가. 그가 이미 오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고? 오히려 혼란과 경계만 더 깊어지게 될 걸세. 그럼 그저 곁에 두기만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오히려 조바심이 나는 것은 강유였다. 하지만 공명은 그 요청조차 듣지 않은 채 단 한번,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내가 아직은, 차마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네. 공명의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 강유는 더는 공명에게 조운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자네도 저이를 계속 곁에 두기 불편하거들랑 마사(馬舍)에 손이라도 보태라고 보내버려. 장담컨대 우리에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온건할걸세."
말을 마친 마대는 잠시 가늘게 뜬 눈으로 조운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
흙먼지가 어지럽게 이는 사이로 대오를 갖추고 있던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 떼의 군사들이 사열부터 시작하여 진법, 기습, 백병전, 퇴각까지 일련의 훈련들을 마친 참이었다. 그것은 지난 사흘간 조운이 가장 많이 본 광경이었다. 조운에게 이곳은 모든 것이 이상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조운은 장안 근처에 이만큼의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군웅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익주를 떠올리긴 했지만 원 익주목이던 유언이 죽고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익주와 이곳 사이엔 산지가 험하기로 유명한 한중이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새 주목이 익주에서부터 오두미도의 본거지인 한중을 지나 이곳까지 대군을 끌고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옥사에서 눈을 뜬 직후에는 장안 근처에서 서로를 물고 뜯으며 또다시 시체의 산을 쌓고 있는 동탁의 잔당들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그치들에게 개죽음을 당할 생각은 없었기에 조운은 최대한 몸을 사리고 심문에 응했다. 하지만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장수들 앞에 끌려갔을 때 그들의 반응은 조운으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조운이 닮았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중 한 사람은 알려주지도 않은 자신의 자마저 입에 담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많은 것들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조운에게 이곳이 어디이고, 자신들이 누구의 군인지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막막함을 애써 숨긴 채 그 새벽에 끌려간 총지휘관의 막사에서 처음으로 이 군에 대해 설명할만한 단서를 보았다.
한승상무향후제갈량(漢承相武鄕候諸葛亮)
한눈에 보아도 병색이 완연한 사람의 뒤로 서 있는 아문기에 적혀있던 글자였다.
조운은 아문기에 쓰인 승상이라는 지위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 동탁의 잔당 중 하나인 곽사가 자신을 스스로 거기장군으로 칭했다. 바닥에 떨어진 한 황실의 권위에서 나오는 지위와 관직에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조운을 놀라게 한 것은 지난 사흘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 군의 엄격한 기강이었다. 그 정강함은 이각이나 곽사 등의 무뢰배들이 거느린 짐승 같은 군대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여전히 북에서 원소와 더불어 이름을 날리는 공손찬의 군조차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석 달이나 적과 대치를 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이 군은 누군가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양성한 최정예임에 틀림이 없었다.
"……."
지금 병석에 누운 채로도 군의 작은 일 하나까지 세세하게 챙기고 있을 그 사람이 떠올랐다. 조운을 믿지만 자신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생각해야 한다며 이곳에 억류해둔 그는 어쩌면 이 모든 의문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사람이었다.
처음 그 막사에 끌려들어가 공명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조운은 큰 실수를 했다. 눈을 풀어주라고 명령하는 공명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눈이 가려져 있어 청각이 더 예민하게 반응했을 터였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공명에게 다가가려다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에게 제압을 당하고 뒷덜미에 서슬 퍼런 칼이 닿은 후에야 자신이 성급했음을 후회했다. 이제 와서는 공명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그 목소리가 언제 들어본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소동 이후 눈의 구속이 풀려 공명을 보게 된 조운은 대번에 그가 중병을 앓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핏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안색, 겨울 나뭇가지처럼 마른 몸은 두껍게 입혀놓은 옷조차 버거워 쓰러질 것 같았다. 오래 앉아있는 것마저 힘들어 보이는 공명에게서 또렷한 것이라고는 오직 눈빛과 목소리뿐이었다. 그것조차도 마지막쯤엔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그는 조운의 항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겨우 지친 몸을 추슬렀다. 처음엔 그런 병자가 이렇게 강력한 대군을 이끄는 총지휘관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다음엔 그가 병든 몸을 하고도 끝까지 군의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강유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공명에게 군의 일을 지시받았다. 강유뿐만이 아니었다. 조운은 각 부대를 맡고 있을 장수들이 모두 공명의 막사에서 직접 명령을 받아 나오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조운 역시 한동안 공손찬의 군에 속한 경험이 있었기에 군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멀쩡한 몸으로도 어지간한 능력과 휘하 제장들의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군에는 다 죽어가는 병자의 명령이 가장 강력했고 가장 유효했다. 신기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화가 울컥 치밀었다. 때문에 이 사흘간 조운의 사고는 늘 그곳에서 막혔다.
휘하 부대를 점검하고 있던 강유에게 또다시 공명의 명을 받은 병사가 찾아왔다. 조운은 말없이 강유를 따라 나섰다. 강유가 공명에게 부름을 받을 때마다 조운은 언제나 공명의 막사 내실 바깥쪽에서 그들의 용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간자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한 외부인으로서 조운이 그어놓은 선이자 무언의 시위였다. 그간 강유를 따라 수시로 드나든 공명의 막사 안은 언제나 그랬듯 독한 약 냄새가 떠돌았다. 그중에서도 조운이 강유를 기다리는 중문 안쪽에는 언제라도 공명에게 바칠 수 있도록 탕약을 달이는 공간도 함께 있었기에 약 냄새와 더불어 더운 습기마저 차올랐다. 그 묵직한 공기에 새삼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따라 용건이 길어지는지 강유는 한 시진이 지나도록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마에 맺히는 땀을 닦으며 문득 조운은 군 전체가 이동하게 되면 떠나게 해주겠다는 공명의 약조를 떠올렸다. 그는 조만간 대치하고 있는 적과 결판을 내려 하는 것일까?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는 군사훈련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이 군은 지금이라도 당장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늘 정비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조운이 이 군이 움직일 가능성에 대해 가늠하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별안간 안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승상! 밖에 의원, 의원은 없는가!"
그것이 강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원과 공명의 시중을 들던 종자들이 조운의 앞을 뛰다시피 지나쳐 내실로 들어갔다. 부산하게 승상을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고통을 참지 못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짜내듯 억눌린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조운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저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비명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아니, 비명이라 할 만큼 큰 소리를 낼 힘도 없어 겨우 내뱉은 고통의 잔재. 조운은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자기 생각을 정정했다. 적과의 결판? 출진? 이 군이 오직 한 사람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것을 직접 보고서도 잘도 그런 추측을 했구나. 조운은 안쪽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에 제 숨마저 턱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공명을 만난 것은 이곳에 잡혀 온 첫날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간 가장 많이 떠올리고 가장 많이 곱씹은 이이기에 그의 모습을 기억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몸으로는 아주 약간의 고통이나 충격도 버텨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었다. 그는 곧 죽을 것이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조운은 저도 모르게 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명을 둘러싼 사람들의 발밑으로 피투성이가 된 서안이 나뒹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막사 안을 채우고 있던 약 냄새가 비릿한 피 냄새에 가려졌다. 어지러운 내실을 방황하던 조운의 시선이 고통에 시달려 혼탁해진 눈과 마주쳤다. 피를 토해 검붉게 젖은 입술이 어렵게 신음을 삼키며 달싹였다.
자룡.
고통마저 삼켜내고 공명이 입에 담은 것은 분명, 조운의 자임이 틀림없는 단어였다. 그가 조운을 부르고 있었다. 순간 조운은 공명을 떠올릴 때마다 치밀어 오르던 화가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아수라장이 된 공명의 거처에서 강유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공명이 끝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을 한 이후였다. 그조차도 숨이 붙어있는 것을 겨우 확인하고 늘어진 몸을 가까스로 침상에 옮긴 지 한참이 지난 뒤였다. 침상 맡에 앉은 의원이 공명의 종자와 함께 입가로 탕약을 흘려 넣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이 없어 목 안쪽으로 넘어가는 양은 미미하기 그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공명에게서 내려오는 지시사항은 진군이나 주둔이 아닌 철군에 맞추어져 있었다. 양의와 비의가 수시로 공명에게 드나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극비로 이루어지는 철군 계획은 공명의 사후를 대비한 것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힘겹게 마른세수를 하던 강유는 문득 막사의 중문에서 내실로 이어지는 휘장 앞에 조운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명은 혼절하기 직전 고통 속에서 신음을 삼키며 조운을 불렀다. 조운이 서있는 곳까지 들릴 리 없는 작은 소리였지만 곁에 있던 강유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조운 역시 공명이 피를 토하며 혼절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조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멍하니 생각하던 강유의 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처음 이곳에 잡혀 오던 날, 저분은 조만간 군 전체가 이동하게 되면 날 놓아준다고 했었소."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철군을 하려는 것이로군."
그말을 듣는 순간 강유의 뇌리에 공명과 마대의 말이 떠올랐다. 그를 마주한 첫날 냉랭한 그를 보며 끝내 눈물을 흘렸던 공명은 그 이후에도 차마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또한, 마대는 이쪽에서 혼자 애틋해 보았자 기억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저분이 죽으면 군을 이끌 이가 없으니 철군을 할 게 아니오. 그러니 나에게 한 말은 결국 자신이 죽을 때까지-."
"조자룡!!"
강유의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말이 어지럽게 엉켰다. 손에는 아직도 공명이 토해낸 피가 묻어 있었다. 강유가 조운을 향해 튀어 나간것은 한순간이었다. 조운이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턱에 강유의 주먹이 꽂혔다. 장신의 몸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휘장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 성큼성큼 조운에게 다가간 강유는 그대로 조운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 어떻게 저분의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해준 것이 없소."
강유에게 멱살이 잡힌 그대로 조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잡혀 온 첫날부터 당신들은 누군가를 닮았다 하며 나를 추궁했지. 심지어는 내가 알려주지도 않은 내 자를 알고 있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당신들 중 아무도 나에게 그것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았소. 나는 여태까지 당신들이 누군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주둔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오.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저분의 죽음을 입에 담느냐고? 나는 저분이 누군지 모르는데, 내가 그것을 입에 담지 못할 이유라도 있소?"
"조자룡은 절대 저분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그건 억지요."
"나도! 나도 왜 하필 당신인지 알고 싶습니다. 왜 하필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인지, 하다못해 저분을 만난 이후의 당신이기라도 했다면 저렇게 혼자 힘들어하실 일은 없었을 텐데!"
어느새 조운을 잡고 있는 강유의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가는 손을 보고 있던 조운은 강유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공명의 침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조운의 발걸음을 강유의 시선이 뒤쫓았다. 자세히 보아야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숨을 내쉬고 있는 공명은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얼굴색이 창백하다 못해 시체처럼 파리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조운은 지금 공명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메이도록 먹먹해지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잃기 직전 날 부르신 것 같았소."
조운은 바스라질 것처럼 마른 공명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직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더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 군 전체가 이동하게 되면 그때 보내주겠다는 말의 뜻은 알 수 있었다. 의심에서 시작된 억류가 아니었다. 간자로 의심되는 이를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애타게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남아달라는 부탁에 가까웠다. 손에 잡힌 공명의 차가운 손은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
공명은 혼절해 있던 꼬박 하루 동안 단 한 번, 꿈꾸듯 눈을 떠 조운을 불렀다.
조운은 여기 있습니다, 하는 대답이 공명에게 들렸기를 바랐다.
**
그날 이후 공명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늘었고 깨어있을 때면 늘 가슴의 통증 때문에 힘들어했다. 조운은 공명의 의식이 있을 때건 없을 때건 공명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약이 독합니다. 약 기운을 제대로 받으시려면 식사를 조금 더 하셔야 합니다."
공명이 반도 먹지 못하고 물린 죽 그릇을 보고 탕약을 받아 들어온 조운이 말했다. 의식을 찾고 난 직후 공명은 조운과 눈조차 잘 마주치지 않은 채 곁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거부했다. 물론 조운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은 처음처럼 거부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조금 조운을 어색해했다.
조운이 가져온 탕약을 마시던 도중 가슴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조운은 황급히 약그릇을 받아 내려놓고 감싸듯 공명을 부축했다. 공명은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통증을 가라앉히고 싶은듯 조운이 연신 공명의 등을 쓸었다. 자신을 단단히 부축한 팔과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공명은 목이 메었다.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
겨우 통증이 가라앉고 난 뒤 자리에 누운 공명은 이불을 꼼꼼히 정리하는 조운에게 말했다. 잠시 조운의 손길이 멈칫했다.
"혹시 제가 곁을 지키는 것이 저어되십니까?"
"그런 것은 아니네. 단지 자네는 내 몸종도 부하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저를 부른 것은 승상이십니다."
이불 정리까지 끝낸 조운은 근처에 있던 호상을 펴고 침상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떤 말을 해도 물러가지 않겠다는 듯 굳게 다물린 입매를 보자 공명의 입가에 저도 모를 웃음이 지어졌다.
"내가 자네를 불렀던가."
"지금도 잠들어계실 땐 종종 부르십니다."
"그런가."
"사실은 승상께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공명으로서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애초에 조운은 부른다고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공명은 몸에 병이 깃들기 시작한 뒤 거의 매일 꾸던 신야성의 그 꿈을 이 조운이 나타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꾸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조금 참겠습니다. 승상께서 건강을 되찾으시면 그때-."
"승상이 아닐세. 내가, 자네가 모실 승상이던가."
"그럼 제가 어떻게 칭해야 하겠습니까."
"내 자가, 공명일세."
공명의 말을 들은 조운의 입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호선을 그었다.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힘겹게 뻗은 공명의 손이 조운의 입가에 닿았다. 조운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제 입가를 매만지는 공명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주름 하나 없는 젊은이 특유의 매끈한 피부를 느끼며 공명은 새삼 그가 조운이지만, 제 사람이던 그 조운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유비조차 섬기지 않는 떠돌이 청년은 앞으로 많은 일을 겪으며 흔들리지 않게 자신을 다듬어 갈 것이다. 조운이 공명에게 와 기꺼이 공명의 옆에 서는 것은 훨씬 더 후의 일이었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마음속에서 욕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처음처럼 경계와 불신을 담은 조운을 대면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지금 이렇게 곁에서 웃는 그를 앞에 두고 미련이 생기지 않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네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나? 잠들 때까지만, 뭐라도 좋네."
공명의 요청에 조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조운의 얼굴을 매만지던 공명의 손은 어느새 조운의 손에 잡힌 채 침상 위에 놓여있었다. 뼈 위에 살갗만 겨우 붙어있는 마른 손을 굳은살이 벤 단단한 손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거짓을 고한 것이 있습니다. 아니, 거짓이라기보다는 숨긴 채 말하지 않은 것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을 듯도 합니다만."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제가 양주에 가려던 길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것이 거짓은 아니지만, 실은 이곳에 잡혀 오기 직전엔 근처 마을을 약탈하던 군사들을 만나 쫓기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며칠을 굶었던 터라 모두 상대하긴 버겁더군요. 그들의 창칼을 맞는 것보다는 훨씬 살 만하겠다 생각해 일부러 위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이후에 눈을 떠 보니 이곳이었습니다."
"자넨 정말 온몸이 담인가 보군."
칭찬인지 질책인지 모를 공명의 반응에 조운이 멋쩍게 웃었다. 그 이후로 계속 조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야기의 내용은 두서없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비교적 최근의 이야기가 있기도 했다. 조운이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유비 일행이라 생각되는 이들을 만난 이야기도 있었다. 공명이 아는 조운은 결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지금의 조운이라고 별반 다를 리는 없다. 하지만 조운은 최선을 다해 공명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손끝이 허전한 느낌에 눈을 뜬 공명은 제 손을 잡고 있던 조운의 손이 슬쩍 풀려 있는 것을 보았다. 호상에 앉아 잠든 조운은 고개를 숙이고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운이 곁에서 머무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이후 공명은 그에게 더욱 솔직해졌다. 어차피 시간 대부분을 함께 있어 숨길만 한 것이 없었다. 깨어있는 시간에 가슴의 통증이 찾아오면 조운에게 가감 없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 공명의 앞에서 조운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아프십니까, 공명 님? 괜찮습니다. 제가 곁에 있습니다. 쉼 없이 공명을 감싸고 쓰다듬으며 달래는 목소리에 공명은 구명줄을 잡듯 매달렸다. 그러고 나면 통증이 가라앉을 즘에는 두 사람 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새 조운의 몸에는 쓴 약 냄새와 희미한 피 냄새가 함께 배었다.
아프지 않을 때에는 주로 이야기를 했다. 말을 길게 하기 힘든 공명보다는 조운 쪽의 이야기가 더 많았다. 조운은 신중하게 고른 말들로 흉중의 많은 것을 공명에게 내비쳐주었다. 공명은 젊은 조운의 고민을 듣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고민하고 고뇌하고 방황하다가 그가 어떤 길을 찾을지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적당히 일반적인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공명은 그것이 조운에게 크게 도움이 될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남의 말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부딪치고 판단하며 커 온 사람이었다. 조운의 이야기를 듣는 공명에게는 언제나 엷은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투병 중에도 승상으로서의 공무는 계속되었다. 대부분이 극비리에 진행되는 철군 계획과 사후계획이었다. 그것만은 조운으로서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 일에 한해 조운은 여전히 외부인이었다. 참석한 모두가 마지막일 것이라 직감한 기나 긴 군의에서 공명은 결국 강유가 급히 부른 조운에게 안겨 나와야 했다.
공명에게서 철군 지시를 받은 장수들이 모인 막사에서 조운이 반쯤 혼절한 공명을 안아 들고 나왔을 때 사위는 완연한 밤이었다. 초겨울에 가까운 가을밤은 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하늘만큼은 티끌 하나 없이 청명한 남색이었다. 공명을 늘 타고 다니는 사륜거에 앉힌 조운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꼼꼼하게 공명의 옷을 정리해주었다. 날씨를 고려하여 입힌 모피가 한없이 무거워 보여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조운은 천천히 공명의 막사를 향해 사륜거를 밀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은 공명은 오히려 조금 정신이 맑아진 듯했다. 숨을 내쉬자 벌써 하얗게 입김이 서렸다.
"밤하늘을 보는 게 아주 오랜만인 것 같네."
"실제로 그러실 겁니다. 제가 공명 님과 함께 이런 밤까지 막사 밖에 있어본 것은 처음이니까요."
공명의 기침소리를 들은 조운에게서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절과 장소는 달랐지만, 달과 별이 제각각 빛을 내는 밤하늘이 신야에서의, 한동안 꾸지 않은 꿈속에서의 그 밤을 떠오르게 했다. 그때 첫 마디를 어떻게 띄웠던가. 문득 장난기가 돋은 공명은 가만히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밤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것을 보니 내일도 맑겠습니다."
순간 사륜거를 밀던 조운의 걸음이 그대로 멈추었다.
"자룡?"
"아, 이제야 생각났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이것을 왜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운의 말투에는 왠지 모를 후련함이 묻어 있었다. 또 무언가 이야기를 해 줄 것이 생각 난 것인가. 공명도 입가에 웃음을 띠며 조운의 말을 기다렸다.
"일전에, 제가 공명 님을 처음 대면하던 날 눈이 가려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눈이 가려진 채 공명 님의 목소리를 듣는데 순간 어디서 들은 것같은 목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공명 님께 다가가려 했던거였습니다."
공명은 자신이 첫 마디를 내뱉자마자 튕기듯 몸을 일으켜 다가오려했던 조운을 떠올렸다. 작은 소동이었고, 그 때문에 공명은 오히려 평정을 조금 찾을 수 있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방금 하신 말씀, 밤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것을 보니 내일도 맑겠습니다, 하는 그 말씀을 들으니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저는 꿈에서 공명 님의 목소리로 그것과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쿵 하는 울림이 울었다.
"꿈…이라고?"
"한동안 자주 꾸던 꿈입니다. 아, 이곳에 온 이후부터는 꾸지 않은것 같지만."
조운은 다시 천천히 사륜거를 밀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밤이었는데, 아주 청명한 것이 지금과 조금 비슷한 듯도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어딘지 모를 성벽 위를 걷는 꿈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제 앞을 걷는 이가 있고 저는 그 뒤를 따릅니다.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문득 멈춰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저에게 처음 건네는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목소리가, 나와 같은가…?"
"꿈속에서 들은 것이다 보니 꼭 그렇다고 확신하긴 어렵지만, 처음 공명 님의 목소리를 듣던 순간에는 그랬습니다. 그때 저 치고는 꽤 몸을 사리고 있었는데도 실수를 했으니까요."
심장이 돌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쿵쿵거렸다. 그것은 늘 겪던 통증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조운이 뒤에 있어서 지금 자신의 표정을 볼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 이야기를 계속 해주게."
"그렇게 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같은데 꿈이라 그런지 제 의지대로 대답이 나오지는 않더군요. 그렇다면 다가가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리 용을 써도 그 간격을 좁힐 수는 없었습니다. 한 다섯 보 정도 될까. 왠지 그이가 가까이 오라고 말해준다면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끝내 그리 말하지 않든가…?"
"네. 끝까지 저를 돌아본다거나, 가까이 오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아주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딱 한 마디, 왜 다시 제 뒤에 서시는 겁니까, 하는 말을 건네고는 몸을 돌려서 가버리니까요. 그게 원망 같기도 하고 체념 같기도 해서, 사실 저에게도 끝 맛이 썩 좋은 꿈은 아닙니다. 악몽까진 아니긴 합니다만."
"……."
"그가 다시 걷기 시작한 후부터는 따라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다섯 보였던 간격이 벌어지고 그는 점점 멀어지는데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그이에게……."
사륜거가 다시 멈춰 섰다. 조운이 말을 고르는 듯 한동안 이야기가 끊겼다. 조운이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조금 전보다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제는 따라가지도 못하고 혼자 걷게 하여 참으로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조운의 마지막 말에 공명은 손을 들어 인후를 잡았다. 목이 꽉 메어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지며 뜨거운 것이 왈칵 솟았다. 무릎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조운은 어깨를 떠는 공명을 보고는 황급히 사륜거 앞으로 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명 님, 또 통증이 오신 겁니까? 잠시만-."
"자룡, 나는."
공명은 조운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한쪽 뺨을 감싸자 반사적으로 조운이 그 아래 손목을 잡았다. 조운의 낯에는 당황스러움과 걱정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언젠가 성도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공명은 그의 건강이 나빠진 것을 알게 되어 몹시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혼자 남겨질 것이 두려웠고,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몇번이고 그를 불러 그가 곁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공명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언젠가 그럴만한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자신이 먼저 다가와 공명의 옆에 서고 싶다는 것이었다. 망설임 끝에 돌아보지 않아도, 곁을 청하지 않아도.
입술이 덜덜 떨려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수없이 숨을 삼키고 짜낸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당신을 원망한 것도, 체념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그럴 수 있을리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그것이 그저 내 꿈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공명 님."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끝내 돌아보지 않아도, 곁을 청하지 않아도 오겠다는 말씀처럼, 그래서 당신이 온 것 아닙니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공명 님, 어디가 아프시면-."
"이것과 그것, 모두가 당신의 꿈입니다. 혼자 걷게 하여 미안하다고요, 아닙니다. 자룡 당신은 내가 가장 힘들고 외로운 순간에 항상 나와 함께 있어주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명은 한동안 조운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영문을 모르고 당황하다가 결국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는 조운의 손길이 가슴 아프도록 다정했다. 조운을 만난 이후부터 함께 했던 긴 시간이 차례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기쁘고 벅찼던 순간만큼 슬프고 아프고 무서웠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조운은 결코 공명을 혼자 두지 않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 생의 가장 마지막에 와서까지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그 날, 신야성에서 동행하기 시작한 산책길의 끝에서도 두 사람은 여전히 함께였다. 달도 별도 제각각 빛을 내는 시린 늦가을 밤이었다.
**
공명은 아주 오래 혼수상태에 빠졌다. 병영 안의 모두가 그들이 가장 경애했던 사람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미리 준비한 대로 대치하고 있던 적들은 알지 못할 조용하고 신속한 철군 준비가 시작되었다.
단 한 번 눈을 떴다. 꿈꾸듯 눈을 뜬 공명은 조운을 불렀다.
조운은 여기 있습니다, 하는 대답이 공명에게 들렸기를 바랐다.
3. 夢中人
통증은, 요 몇 달 사이 그에게 다시 찾아들던 꿈과 닮아있었다.
조운은 거친 날숨과 함께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희뿌연 시계로 침상의 한쪽 끝에 세워놓은 창이 들어왔다. 명치끝을 후벼 파던것이 저 창이었나? 손을 들어 가슴 아래를 더듬었다. 침의는 식은땀에 젖어있었지만, 상처는 없었다. 여전히 다듬어지지 못한 숨소리가 귓가에 거슬리게 내려앉았다.
"장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침상이 놓인 휘장 밖에서 부관이 물어왔다. 최근 한밤중에 잠을 깨는 일이 많아진 조운을 염려해 등지가 곁에 붙여 둔 부관은 신기할 정도로 기민하게 조운의 기척에 반응하곤 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당장 밀고 들어올 기세였기에 조운은 크게 한 번 숨을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별일 아니네. 들어오지 않아도 돼."
단 두 마디를 말하는 데에도 피로함이 몰려들었다.
밖에서 머뭇거리던 부관이 멀어지자 조운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옷궤를 열었다. 식은땀에 젖은 상의를 벗고 새 옷을 갈아입으며 다시 한 번 명치끝을 내려다봤지만, 상처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통증이 어디 찔리고 베인 곳에서만 오는 것이던가. 알면서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우둔함에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옷을 갈아입은 조운은 다시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온몸이 무거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아침엔 일찍 떠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 둬야…….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다가 서안 위의 서간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성도에서 온 서간에는 익숙한 필체로 조심스럽게 조운의 안부를 묻는 글이 적혀있었다. 그 서간을 받아본 조운은 공명이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측근들은 대부분 눈치 채고 있었으니 그것이 공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답신은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조만간 성도를 방문할 계획이 있었고 공명과는 그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조만간이 내일 아침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조운은 여전히 공명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침상에 누운 조운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일각도 지나지 않아 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어설프게 든 잠결에 그 꿈이 불쑥 끼어든 탓이었다.
처음 그 꿈을 꾼 것은 조운이 고향을 떠나 중원을 떠돌던 때였다. 그때 조운은 동탁의 잔당들이 낙양으로 떠나는 황제를 놓친 뒤 저들끼리 서로를 물어뜯던 위수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장안에서부터 미현까지 또다시 시체들이 쌓였다. 근처 양민들에겐 군율로 통제되지 않는 군대가 재앙처럼 몰아쳤다. 매일같이 약탈이 자행된 마을에는 기아상태에 빠져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사람들만 남겨졌다. 그보다 한 해 전, 조조의 군사들이 휩쓸고 지나간 서주에서 본 것만큼이나 참담한 광경이었다. 그런 광경은 아무리 보아도 무감해질 수 없었지만 당장 조운 하나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약탈을 하고 떠나는 병사들을 건드려봤자 다음날이면 다른 패거리들이 몰려와 동료의 복수를 운운하며 더 지독한 일들을 자행하곤 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결국 참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타고 다니던 말조차 줘 버린 후인지라 앞뒤로 공격해오는 패거리들에게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맨몸으로 산속을 달렸다. 정신없이 찌르고 베기를 여러 번, 조운이 위협적인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적들도 주춤했지만 조운 역시 많이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것이 언제쯤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지고 다니는 노자가 충분해도 살만한 식량이 없는 곳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근근이 사냥해 잡은 산짐승들은 그 역시 피골이 상접해있었다. 그마저도 굶주린 양민들과 나누다 보면 조운이 먹을 수 있는 것은 허기를 겨우 면할 양밖에 되지 않았다. 위수가 흐르는 낮을 골짜기를 등 뒤에 두고 한순간 발밑이 훅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운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곳에서 쓰러진다면 바싹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발견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 물로 뛰어드는 것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강으로 몸을 던졌다.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은 조운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위수 하류 근처의 한 촌락이었다. 조운은 자신을 구해준 집주인에게서 자신이 꽤 오랫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꿈은 조운이 의식을 잃은 사이에 꾼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한눈에 보아도 병색이 완연한 누군가가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기분이 뒤숭숭할 정도로 강렬한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운이 오랫동안 그 꿈을 잊고 살았던 것은 그것이 당시에도 파편뿐이 남지 않았던 순간의 모습이었고, 또 꿈속의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명."
조운은 신음처럼 공명을 입에 담았다. 수십 년 만에 다시 꾼 꿈은 매번 다른 장면들로 조운의 잠결에 깃들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늘 같았다. 꿈속에서 보는 공명은 조운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지치고 야윈 모습이었다. 때로는 죽은 듯 누워 미약한 숨을 내쉬고 있기도 했다. 어떤 모습이건 꿈속의 이가 공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 꿈은 조운에게 지독한 악몽이 되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직 주변이 어둑한 이른 새벽부터 성도로 떠날 행장을 점검하던 등지는 조운을 보자마자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군의를 닦달해 탕약을 챙겨왔다. 쓴 냄새가 잔뜩 올라오는 약그릇을 앞에 두고 조운은 난감하게 웃었다.
"백묘, 난 그냥 잠을 조금 설쳤을 뿐이라네."
"장군의 얼굴색을 직접 보시면 그런 말이 안 나오실 겁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이든 드셔서 몸에 나쁜 약은 아닙니다."
형형하게 눈을 빛내는 등지에게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등지의 말대로 먹어서 나쁠 약은 아니겠지만, 순순히 먹기에는 자신을 병자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약에 독 안 탔습니다. 설마 병자 취급하지 말라고 시위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백묘, 난 가끔 자네가 무서워."
독촉 섞인 눈초리를 뒤로하고 단숨에 들이켠 약은 혀가 저릿할 정도로 썼다. 다음에 또 약을 먹이려거든 쓴맛이 조금 덜 한 것으로 가져오라는 말에 등지가 코웃음을 쳤다.
"성도에 도착하시면 꼭 의원을 찾아가 보셔야 합니다. 뭣하면 폐하께 어의라도 한 번 청하시든지요. 군대를 따라다니는 놈들이야 어디 찔리거나 부러진 델 고치는 건 잘해도 그 외의 것은 영 미덥지 못하잖습니까."
"사실 자네가 제일 미덥지 못하게 생각하는 건 나인게지?"
"저에게 지나친 솔직함을 강요하지는 마십시오."
즉석에서 날아오는 대답에 조운은 허허 웃고 말았다. 마지막 짐을 점검하던 수행원 중 하나가 들어와 떠날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등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조운에게 작은 통 하나를 건넸다.
"진통 효과가 있는 환약입니다."
잠시 등지가 내민 손을 바라보던 조운은 그것을 받아 소매 속에 갈무리했다. 막사 밖을 나오자 간소하게 꾸려진 행장의 제일 앞에 조운의 말이 대기하고 있었다. 기분 좋게 푸릉거리는 말의 갈기를 몇 번 쓰다듬은 조운은 가볍게 말 위에 올랐다.
"자, 그럼 내가 없는 동안 게으름 피우지 말고 평소처럼 잘들 하고 있게."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등지의 배웅을 받으며 조운이 말의 옆구리를 찼다. 모자란 잠으로 인해 무거웠던 머리가 초여름의 아침 공기를 맞고 조금 또렷해졌다. 말은 빠른 걸음으로 진채를 나섰다. 진채 밖을 나와 얕은 구릉을 하나 넘자 제법 너른 분지를 개간한 둔전이 펼쳐졌다. 잘 익은 보리들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당장 오후부터 병사들의 일과에는 보리수확이 계획되어 있었다. 얼었던 땅이 겨우 녹은 뒤 시작되었던 잔도 보수도 장마가 지기 전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이렇게 바쁜 때에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이 마뜩잖았지만 얼마 전 성도에서 직접 황제의 사자가 찾아와 다짐을 받아간 터였다. 거기에 등지의 아우성까지 몫을 더했다. 최근 등지는 어떻게 해서든 조운에게서 하나라도 더 일거리를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듯했다. 그가 조운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마냥 기껍지많은 않았다. 나이 들어 느는 것이라고는 쓸데없는 아집과 꼬인 심사뿐이구나. 조운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남정에 도착하려면 조금 서둘러야겠다."
산길을 벗어나 말이 달려도 안전할 길에 이르자마자 조운이 수행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곧이어 말이 세게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에 맞추어 심장박동과 호흡이 빨라졌다. 한때 조운에겐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일 때도 있었다. 사람의 몸은 정말 쉽게 약해진다. 조운은 조금씩 가빠오는 숨을 느끼며 진채의 제 막사 안에 놓아둔 공명의 서간과 오래전 공명이 산책길에서 곁을 청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의 불신 어린 시선 속에서도 묵묵히 제 할 일을 찾아 하던 젊은 서생의 뒷모습을 보며 의연하고 굳세 보이지만, 조금쯤은 외롭지 않을까 멋대로 헤아렸던 것 같다. 한동안 성 밖의 풍경들을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조운에게 말했다. 뒤에서 제 등만 바라보지 마시고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은 어떠십니까, 라고. 그것은 매우 뜻밖이었지만, 어쩌면 자신은 공명이 그렇게 뒤돌아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걸음을 옮겨 그와의 거리를 좁히자 기뻐하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그때 제가 당신에게 그 말을 건네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아십니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서로의 옆자리가 익숙해졌을 무렵 그가 그날의 일을 꺼냈을 때 조운은 그저 미안함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다면, 다시는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
-자룡.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고통을 삼켜내고 부른 것은 분명 자신의 자였다. 검붉은 피가 그대로 묻은 입술이 다시 한 번 열리려다가 끝내 신음을 내뱉었다. 아니 그것은 신음보다는 비명에 더 가까웠다. 단지 비명이라 느낄 만큼의 힘조차 없이 가슴 속 어느 한구석인가가 쪼그라들며 터지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조운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리를 내어 공명을 부르려 했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을 부르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곁에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릴 수 있다면.
"공……."
눈을 떴지만, 그것이 꿈 때문인지 통증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숨 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떠나기 전 등지가 건네준 약이 떠올랐다. 하지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옷이 걸려있는 옷걸이까지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쓰러졌다. 쓰러지며 옷자락을 잡아챈 탓에 한바탕 큰 소리를 내며 옷걸이 역시 바닥으로 엎어졌다. 잇새로 나직하게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옷걸이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은 옆방에서 수행원들이 들이닥쳤다.
"장군!"
"소매에, 약."
조운의 말을 알아들은 수행원이 옷소매를 뒤져 약통을 꺼내왔다. 조운은 환약을 한 웅큼 덜어 입에 털어 넣었다. 입안 가득 쓴맛이 차올랐다. 아무리 용하다 해도 먹자마자 즉효가 나는 약은 없었다.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아 침상에 걸터앉은 조운은 한동안 호흡을 다스리며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지금 몇 시쯤 되었는가?"
"한식경쯤 전 축시를 알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성도가 코앞인 곳이었다. 가능하면 아픈 기색 없는 낯으로 공명을 만나고 싶었다.
"자네들은 그만 나가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르겠네."
성도를 향하기 시작한 이후 그럭저럭 평온한 밤이 이어지고 있어 방심하고 있었다. 수행원들을 모두 내보낸 조운은 억지로라도 누워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통증이 있거나 그 꿈을 꾼 후면 늘 그랬듯 다시 잠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수차례 그 꿈을 꾸어왔지만, 오늘처럼 그가 자신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새벽 해가 떠오를 때까지의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성도에서 가까워질수록 길거리에 사람들이 늘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퍽 분주하고 또 활기차 보였다. 이곳은 뭐니 뭐니 해도 천자가 머무르는 황궁이 있는 곳이었다. 바로 지난해까지 나라 전체가 전쟁 준비에 바빴고, 또 그렇게 국력을 쏟아 부은 북벌이 생각지도 못하게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조차 이곳 성도의 안정됨을 해칠 수는 없었다. 건국 초기부터 공명이 먹고 자는 시간마저 아껴가며 기반을 다져놓은 나라였다. 한 번의 실패로 나라가 흔들릴 일은 없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는 숫제 들뜬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아마 그것은 내일 있을 황제의 탄생연 준비도 한몫하고 있을 터였다. 조운이 성도에 돌아온 것도 그 탄생연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성도의 집에 들러 기별을 받은 하인들이 미리 준비해둔 조복을 갈아입었다. 사실 제집이라 칭하기엔 지나치게 낯선 곳이었다. 한중과 성도를 자주 오가며 정무를 본 공명과 달리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성도에서 떠나 있었던 것을 상기했다. 예를 갖춰 차려입은 조복 역시 갑옷에 비하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조 장군!"
황궁에 들어 알현한 황제 유선은 조운을 보자마자 옥좌에서 일어서 뛰다시피 내려올 정도로 그를 반겼다. 이번 생일이 지나면 황제 유선은 스물두 살이 된다. 그는 조운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청년이 되어있었다.
"신 진군장군 조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어쩌면 그렇게 얼굴 한 번을 안 보여주시오. 짐이 조 장군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꼬박 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송구하옵니다, 폐하."
지난 북벌, 출병에서부터 시작하여 뜻하지 않은 퇴각과 그 후처리에 이르기까지 조운은 군의 총책임자인 공명과 더불어 잠시도 쉴 틈없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유선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유선이 조운에게 한 말은 책망이라기보다는 반가운 이를 향한 투정에 가까웠다.
"헌데,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오.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 게 아니오?"
"옥좌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황제가 건네는 말에 조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이리 장성하신 만큼 신 역시 나이가 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그런 것이라면 다행이오만. 승, 아니 우장군도 그렇고 짐이 경들을 볼 때마다 아주 가슴이 철렁철렁합니다. 나라의 중대사를 맡은 사람들이 어쩌면 그리들 제 몸 돌보는 데는 무심한지."
문득 이십여 년 전 품에 안고 어르던 아기가 떠올랐다. 그때 유선은 저를 품고 조조군 사이를 돌파해야 할 조운을 걱정하는 듯 울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조운의 입가에 조금 전의 쓴웃음과는 다른 웃음이 머금어졌다.
"무거운 발걸음을 해준 김에 어의에게 진맥이라도 해보라고 해야겠소. 조 장군, 일단 함께 오찬을 합시다. 장군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차려놓으라 일렀소. 설마 삼 년 만에 나타나 얼굴만 잠깐 보여주고 갈 생각은 아니었겠지요? 함께 식사하고 어의까지 만나본 후에 보내드리리다."
"폐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조운이 순순히 대답하자 유선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유선은 오래간만에 만난 조운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주 오래전의 일부터 시작해 옛사람들이 하나둘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떠난 사람들을 얘기할 때 유선은 슬쩍 눈시울을 붉혔다. 생일을 하루 앞둔 젊은 황제는 조운의 앞에서 유독 떠난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첫 시작과 같았다. 짐이 우장군을 볼 때에도 늘 하는 말이긴 하지만 조 장군, 그대도 부디 몸을 보중하시오. 그 말에 조운은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조운이 유선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대기하고 있던 어의까지 만나고 궁을 나왔을 땐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조운을 진맥한 어의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쪼록 장군께서도 이제 나이를 생각하실 때가 됐습니다. 나이 든 몸에 병마가 깃들기 시작하면 쉬이 낫기 힘들다는 것쯤은 아실 때 아닙니까. 질책하듯 나오는 말에 자네 그 말은, 내가 낫지 못할 거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되겠는가? 하고 묻자 어의는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가 도움이 될 만한 약을 지어 올리겠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우장군께로 가자."
조운이 말을 출발시키며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공명은 조운이 성도에 도착한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운은 자신이 아직 공명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온 성도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는 가운데에서도 우장군부는 평소에도 그럴 것이 틀림없는 정돈된 분주함이 느껴졌다.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 공명의 집무실로 안내되어 가는 길에도 양팔에 죽간을 한가득 안은 속관들을 몇 명이나 지나쳤다. 공명의 업무량은 조운조차 늘 혀를 내두르게 했다. 중문을 지나자 집무실의 가장 상석에 앉아 죽간을 보고 있는 공명이 눈에 들어왔다. 조운은 집무실로 들어가 자신이 왔음을 알리려는 시종을 붙잡아 말렸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으신 모양일세. 내 따로 후원에서 기다릴 테니 방해하지 마시게."
"하지만-."
"얼추 끝나실 무렵 귀띔만 한 번 해드리게."
그렇게 부탁한 조운은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역시 조운에겐 오랜만에 방문하는 곳이었다. 몇 년 사이 더욱 빽빽해진 나무들이 녹색의 잎사귀를 드리우고 있는 곳을 지나자 작은 연못을 반쯤 차지하고 있는 정자가 나타났다. 정자의 끝까지 걸어간 조운은 정자 난간을 붙잡고 연못 안쪽을 바라보았다. 물고기 몇 마리가 유유자적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조운은 공명이 생각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연못 속의 물고기들을 바라보곤 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유비가 죽은 직후 유독 그런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조운은 공명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지 망설이면서도 결국 그 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공명이 정말로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에는 조운이 다가온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어떤 경우이건 공명은 조운이 제 곁에 와 있는 것을 알아챈 순간 안도가 담긴 웃음을 지었다.
"왔으면 왔다 알리지도 않고 그곳에서 혼자 뭘 그렇게 웃고 계십니까."
한순간 잔잔한 연못 위에 파문을 그리듯 공명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조운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거진 나뭇가지로 뒤덮인 길의 끝에 공명이 서 있었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습니다. 항상 여기 서서 연못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없을 때 이곳에 서 본 것은 처음인 듯합니다."
"뭔가 생각해야 할 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말에서 뼈가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지레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명은 서 있던 곳에서 몇 걸음을 더 걸어 조운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겨울이 끝나기 직전 한중에서였다. 조운은 찬찬히 공명의 낯을 살폈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크게 나빠 보이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조운을 살피던 공명은 대번에 안색을 흐렸다. 조운의 뺨 위로 서늘한 묵향이 배어있는 손가락이 닿았다.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아침저녁으로 백묘에게 시달리며 약을 챙겨먹는 것이 일입니다."
조운은 그 말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들리기를 바랐다. 어차피 자신은 거짓말에 서툴렀고, 무작정 숨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니, 애초에 이미 알고 있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무리인 시도였다. 공명은 마음만 먹는다면 조운을 진찰한 어의에게서 모든 걸 들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조금 전 폐하를 뵌 뒤 어의에게서 진찰도 받았습니다.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약을 지어주겠다고 하더군요."
"오늘따라 굉장히 솔직하십니다."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폐하부터 시작해 제 부대의 부관들까지 모두 당신 편인 것, 저도 압니다."
대꾸하는 목소리에 불퉁한 기색이 섞여 나갔는지 공명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은 기색은 아니었다. 공명이 조운을 마주 보던 눈을 정자 밖으로 돌렸다. 어스름이 깔린 연못에는 더는 물속을 노니는 물고기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어두워지는 수면을 바라보던 공명이 입을 열었다.
"오래전에 제가 막 출사했을 무렵 선제 폐하께서 저를 물에 빗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기억납니다. 그때 한창 익덕이 당신을 물 선생, 물 선생 하고 불렀던 것도."
조운의 대답에 공명이 그때를 기억하며 엷게 미소 지었다.
"그랬었지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는 그 말씀은 지금 떠올려보아도 제겐 그저 과분할 뿐이지만, 그래서인지 가끔 이곳에 서면 선제 폐하의 생각이 납니다."
조운은 그렇게 말하는 공명의 목소리가 잠긴 것을 눈치챘다. 손을 조금 들어 힘없이 늘어져 있는 공명의 손을 잡았다.
"백제성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내가 한 가지, 자룡을 두고 갔다는 게 자네에게 조금 면목이 서네, 자룡이 있으니 물고기가 없어도 내 물이 혼자 외롭게 흐를 일은 없겠지, 하고."
"공명."
"불충하게도 제가, 그 말씀에 진정 안도를 했습니다. 아마도 선제께서는 어린 태자를 새로운 황제로 모시고 나라를 책임져야 할 승상에게 가장 믿을만한 장수를 남겨주신 것을 이야기하신 것이겠지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갈공명에게 조자룡이 갖는 의미 역시 그보다 가볍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무겁고 클지도 모릅니다. 이 나라는 이제 한 사람이 없다 해서 무너지지 않겠지만, 저는 다릅니다."
떨리는 목소리의 끝이 갈라졌다. 조운은 어느새 공명의 손이 손가락 마디가 희게 질릴 정도로 자신의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애써 표정을 감춘 공명의 옆모습에 피를 흘리며 자신을 부르던 꿈속의 모습이 겹쳤다. 조운은 그것을 단순한 악몽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꼭 꿈과 같은 모습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공명이 그토록 힘들고 아파할 때 자신이 곁에 있어주지 못할 것이 확실했기에 그랬다. 한순간 이를 악문 조운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그대로 공명의 몸을 끌어당겼다. 저항 없이 끌려온 몸을 안아 표정을 가리듯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자룡."
학창의의 소맷자락이 뒷덜미를 감쌌다.
"아프지 마십시오."
귓가에 내려앉은 공명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잔 떨림이 남아있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조운의 가슴에 묵직하게 매달렸다. 길고 섬세한 손끝이 뒷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공명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미끄러져 나오다가 결국 혀끝에서 삼켜졌다.
그 망설임을 알겠다는 듯 공명이 나지막하게 조운을 불렀다.
"자룡."
"여기 있습니다."
"…그냥, 그겨면 됩니다. 반평생을, 모든 시간에 그래 주었던 것처럼."
불현듯 오랫동안 공명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음이 떠올랐다. 신야에서의 그 밤, 공명이 망설임 끝에 함께 걷기를 청했던 날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전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공명은 다시 한 번 조운을 불렀다. 여기 있습니다, 하는 대답에 안도 섞인 한숨이 되돌아왔다. 그 순간 조운은 지금 그 말을 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영영 전할 기회가 없을 것을 예감했다.
"예전부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조운은 공명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의아해하는 얼굴을 보며 입 끝을 당겨 웃는 것이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날, 함께 걷자 청해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입 밖으로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매 순간, 당신 곁에 있을 때마다 그랬습니다."
입가에 공명의 손가락이 닿았다. 호선을 그은 입술을 따라 손끝이 움직였다. 공명이 유독 조운의 웃는 얼굴을 좋아하는 것만큼 조운 역시 웃을 때마다 닿아오는 공명의 손가락이 좋았다.
"그러다보면 그 전에는 왜 당신 뒤에만 서 있으려 했는지 문득 아쉬워져서. 언젠가 그럴만한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제가 먼저 당신에게 다가가 거리를 좁히고 당신 옆에 서고 싶습니다."
"자룡."
"당신이 망설임 끝에 끝내 저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사실 정말로 해야 할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조금 더 미뤄두기로 했다. 아직 조운은 공명에게 자신이 곁에 있음을, 곁에 있을 것임을 확신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언젠가 찾아올 가장 힘들고 외로울 순간에도, 한때 자신이 곁에 있었다는 이 확신이 그에게 약간의 위안쯤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할 수만 있다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서 공명의 숨이 느껴졌다. 그 숨결에서 느껴지는 떨림을 덮으려는 듯 조운은 고개를 숙여 그 위로 제 숨을 더했다. 어느새 후원에는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미지근하고 습기가 많은 바람이 정자에 선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구름이 걷히고 드러난 달빛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달무리처럼 연못 위로 드리웠다. 맞붙은 그림자는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
급하게 진채를 나서는 병사의 말발굽 아래로 바싹 마른 늦가을의 낙엽이 바스러졌다. 그가 소식을 전해야 할 사람은 지금 한중 가까운 곳의 남정성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시간 안에 닿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또다시 그 꿈이다. 하지만 이 꿈이 끝나도 눈을 뜨지는 못할 것이다.
조운을 부르는 공명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꺼질듯 약했다.
조운은 여기 있습니다, 하는 마지막 대답이 공명에게 들렸기를 바랐다.
終.
2014. 삼국지 쁘띠온리 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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