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량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등지고 키 큰 청년이 허리를 숙여 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량은 순간적으로 앉은채 뒷걸음질 치며 청년을 향해 경계의 색을 나타냈다. 일행과 떨어진 피난민? 아니면 조맹덕의 군에서 온 척후인가? 어느쪽이든 량에게는 반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저도 모르게 땅을 짚고 있는 손끝이 떨렸다. 얼핏 청년이 그것을 알아챈듯 피식 웃는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떨지 마시오. 공자가 하도 애타게 부르길래 일부러 가던 길도 멈추고 온 것인데."
"부른 적 없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공자로군."
량이 숙부의 일행에서 떨어져 다른 피난민들 사이에 섞이게 된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행렬의 어디쯤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조조군이 온다는 외침. 그것은 이미 조조군의 잔혹성을 한계까지 느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불길처럼 번진 공포는 금세 광란으로 바뀌었고 모든 사람들이 한 걸음이라도 더, 어딘가에서 올 조조군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아우성쳤다. 놀라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고 어린 동생을 가까스로 마차에 올려놓은 직후 량은 몰아치는 인파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쪽을 보며 울고 있는 동생과 사색이 된 숙부를 향해 손을 뻗어봤지만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고, 그 상황에서 괜히 버텼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그대로 사람들에게 밟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밀쳐지고 당겨지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진창과 신음을 흘리거나, 혹은 그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널부러져있는 광경 뿐이었다. 량은 끝이 없을것 같던 피난민 무리의 끝에 낙오자들과 함께 남겨졌다. 실낱같이 이어지는 행렬만이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지만 어느순간 그조차 놓치고 말았다.
"부른 적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보시다시피 무리에서 낙오되어 아무것도 내어드릴 것이 없는 홀몸이니 이 자리에서 죽일게 아니라면 못본 척 공께서 갈 길을 가십시오."
"아하, 그래서 그렇게 애타게 불렀군."
"부른 적 없-!"
"참 무섭고 힘들었겠소. 용기는 있으나 아직 어린 공자로 보이는데."
청년은 발끈하는 량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량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량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차는 퍽 다정한 빛을 띄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고, 또 자신이 불렀다는 알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그 청년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아올랐다. 청년의 말대로, 량은 숙부와 헤어지고 피난민의 행렬마저 놓친 후부터 모든 것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되자 최선을 다해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사실 공자가 아무리 애타게 불렀다 해도 우리가 만날 인연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닿지 않았을거요."
청년이 손을 뻗어 량의 눈물을 닦아냈다. 저 사람의 정체를 알수도 없는데 이런 꼴을 보여주다니.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피난길을 떠난 후 그 어느때보다 안심이 되는걸 부정할수는 없었다. 청년은 참을성 있게, 간혹 량을 토닥여주며 량이 울음을 멈추기를 기다려주었다.
"자, 그럼. 일어나볼까?"
량이 거의 울음을 멈추자 청년은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하지만 량은 곧바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오른쪽 발목이 퉁퉁 부어있었다. 량이 끝끝내 행렬을 놓치고 만 것 역시 이 부상의 탓이었다.
"저런, 이런 다리를 해서 아픈 내색도 안하다니. 빨리 치료를 받는게 좋아 보이니 일단 공자의 일행을 찾아야겠소. 공자의 이름이 무엇이오?"
청년은 량의 양 팔 사이에 제 팔을 끼워 량이 지지하고 일어날 수 있게 하며 물었다.
"량, 제갈량입니다."
"좋은 이름이로군."
청년이 웃으며 대꾸하는 것과 동시에 발 아래에서부터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을 휘감았다가 서쪽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량을 부축한 채 서 있던 청년의 주변으로 휘파람과도 비슷한 소리가 몰려들었다. 청년은 그 신기한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량을 내려다보았다.
"공자의 일행도 공자를 애타게 찾는 모양이오. 공자를 부르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으니."
"그런게 들리십니까?"
"들리오. 그리고 별로 듣고싶지 않은 소리도 함께 들려왔는데, 조맹덕의 척후들이 바로 우리 뒤에 있소. 아마 이 앞쪽에 있는 빈 마을에 진을 치려고 탐색을 나온 모양인데."
청년의 말에 량의 몸이 굳었다. 청년에게 몸을 조금 더 기대고 목을 빼어 뒤쪽을 멀리 바라보자 조금씩 흙먼지가 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엔 몸을 피할곳이 전혀 없었다. 흐음, 하고 머리 위에서 고민하는듯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는 수 없지. 공자, 꼭 잡으시오."
"네? 으앗!"
단단한 팔이 허리를 꽉 감은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강한 힘에 이끌려 몸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순간 눈을 질끈 감은 량의 발 밑에는 디딜 곳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소, 절대 떨어지지 않으니까."
귓가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와, 량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움츠린 발 밑으로 바람이 펄럭였다. 청년의 한 팔은 여전히 량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지지한 채였다.
"발을 내딛고, 천천히, 늘 하던 것처럼 걸으시오. 다친 발로 디뎌도 아프지 않을테니까."
청년이 웃음기 섞인 얼굴로 시범을 보이듯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 얼굴을 본 량 역시 조심스럽게 한쪽 발을 내디뎠다. 발 밑으로 량의 몸을 띄우듯 바람이 밟히며 지나갔다. 그 느낌에 량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청년의 말대로, 다친 발로 내딛는 걸음 역시 전혀 아프지 않았다. 지상의 가장 큰 나무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일 높이였지만 이 걸음이 지금까지 걸었던 그 어떤 걸음보다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잘 하는군."
량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함께 걷고 있는 청년의 존재 때문이었다. 잠시, 도약하듯 나뭇가지 끝에 착지했다가 다시 허공으로 몸을 띄울 때에도 청년은 량의 호흡을 살피며 움직였다. 바람을 타고 걷는 걸음에 익숙해진 듯, 망설임이 없는 량을 내려다보는 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이왕이면 조금 더 좋은 풍경이 보이면 좋았겠지만, 여러모로 조맹덕을 원망하게 되는군."
어느새 사위가 어스름해지고, 멀리 피난민들이 모여있는듯 여기저기 횃불을 밝힌 낡은 성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부드럽지만 강한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힘껏 밀어내듯 불어왔다.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청년은 무리없이 성벽 위로 가볍게 몸을 착지시킨 뒤 량 역시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들어 사뿐히 제 발 앞에 내려주었다.
"저 아래, 공자의 일행들이 있소."
청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량을 찾는 듯 사람들 사이를 뒤지는 숙부와 다른 일행들이 있었다. 량이 그들을 발견한 다음 순간, 그때까지 량의 허리를 감고 있던 청년의 팔이 스르르 풀렸다. 량은 저도 모르게 청년의 팔을 잡았다.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다급하게 내뱉는 량의 물음에 청년이 웃으며 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도 우린 다시 만나기 위해 오늘 이렇게 만난게 아닌가 싶소. 그러니 누구든 제발 도와달라고 부르는 공자의 소리가 그토록이나 선명하게 들려왔겠지."
"언제…."
"언젠가 때가 되면. 그때가 되면 오늘보다는 더 좋은 풍경을 보여줄 수 있게 되길 바라겠소."
그때까지 무탈하시오. 량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청년은 그대로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을 디딜 때와는 달리 아픈 다리를 끌고 내려다 본 성벽 아래에는 희미한 휘파람소리가 맴도는듯 했다.
++
어느새 공기중에 달큰한 복사꽃 향기가 섞이는 계절이었다. 지난 가을과 겨울 두 번의 방문을 모두 허탕을 친 유비는 이번에야말로 와룡을 만나겠다며 심기일전을 하고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야, 자룡아. 이리 와서 큰형님 좀 말려봐라. 두 번을 헛걸음을 하시고도 거길 또 가신다고 한다."
"어떤가, 자룡. 오늘은 좀 좋은 바람이 불지?"
"좋기는 개뿔!"
뒤에서 툴툴대는 장비에게 가볍게 타박을 한 유비가 함박웃음을 진 채 조운에게 다가왔다. 조운 역시 그런 유비를 보며 마주 웃음지었다. 긴 인연이 시작될 바람입니다, 주공. 조운의 대답과 함께 먼 곳에서부터 꽃향기가 섞인 바람이 휘파람처럼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