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 때가 언제던가, 한창 공손 사형이 취미생활에 열을 올리던 때였네. 워낙 과시욕이 좀 있어서 한 번 사냥을 나가면 끝끝내 대단하다 싶은 짐승 한 둘 이상을 잡지 않고는 성을 풀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날따라 허탕을 쳤네. 기분이 나빠진 채로 돌아오는데 풀숲에서 털이 누런 짐승이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더란 말일세. 여기 운이 나쁜 짐승이 한 마리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사형이 활을 쐈고 캥, 하는 짐승의 비명소리가 들렸지. 그런데 여우 쯤 되지 않으려나 싶던 그 짐승이, 글쎄 새끼 범이지 뭔가. 사형이 쏜 화살이 뒷다리에 박혀 있었어. 아무리 범이라고는 하나 이제 사람 팔뚝보다 조금 더 큰 새끼이니 어찌 안쓰럽지 않을 수 있겠나. 낑낑거리면서도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이를 드러내는데 그것조차 아직 위협적이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손사형이 또 제 허세가 도져서 이왕 잡은 새끼 범이니 길들여 자기의 애완묘로 삼겠다며 숨통을 끊지 않은 채 데려간 것 정도일까.
아무튼 뜻하지 않게 범을 득한 사형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고, 그 날 잡은 자잘한 짐승들을 안주 삼아 밤 늦게까지 술자리를 벌였다네. 새끼 범은 상처를 치료하고 우리에 가둔 채 제 옆 자리에 끼고 있었지. 그런데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고 사형도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갑자기 연회장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누군가가 자기 앞을 막아서는 병사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들어오지 뭔가. 그 몸놀림이 도저히 사람 같지가 않았다네.
사람이 아닌건 맞지.
끼어들지 말게, 헌화. 아무튼 순식간에 벌어진 그 일에 연회장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조용해졌고 모두의 이목이 그쪽에 쏠렸는데, 그렇게 거침없이 들어와서 공손 사형을 똑바로 바라보고 선 인물은 키만 훤칠하게 컸지 아직 약관도 되어보이지 않는 앳띤 얼굴의 청년이었다네. 자기를 향해 겨누어진 창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가오는 청년에게 공손 사형이 웬 놈이냐, 하고 물으니까 그가 입을 열더군. 제 가장 어린 조카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손을 들어 가리키는 것이 사형이 옆자리에 끼고 있던 새끼 범이었다네.
…….
자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건가 싶지?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가 그랬지. 멀쩡히 인간 형상을 하고 있는 청년이 범을 가리키며 자기 조카라니? 순식간에 좌중에 웃음이 터졌네. 하지만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어. 청년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서서히 웃음소리가 잦아 들었네. 그리고 청년이 다시 말을 이었네. 그 아이, 이제 세상 빛을 본지 갓 두 달이 넘었을 뿐인 젖먹이입니다. 때문에 멋모르고 공들이 계신 곳의 경계를 넘어가 화를 당한 것입니다. 아직 세상을 모르는 어린 범의 실수였사오니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깊은 시름에 빠져있는 제 형님과 형수님께 새끼를 돌려 주십시오. 그리만 해 주신다면 그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의 부탁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정중했지. 하지만 공손 사형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어. 헛소리 하지 말고 당장 물러가라고 그에게 호통을 쳤지. 그 호통을 듣고 청년은 공손 사형을 바라보던 눈길을 낮춰 우리에 갖힌 새끼 범을 바라봤네. 그런데 그 눈초리가, 진짜 어린 피붙이를 보는 것처럼 애틋한거야. 결국 청년은 사형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한 뒤 뒤돌아 나갔다네. 그 청년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 안에 갇혀있던 새끼 범이 또 캥캥 울더구만. 청년이 돌아간 뒤 술자리도 흐지부지 파하게 됐고, 나도 내 막사로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범들이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네. 맹수의 울음소리였는데도 그것이 무척 처연했어.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싶었는데, 다음날 밤, 그 청년이 또 다시 찾아왔다네. 새끼 범은 잡힌 이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앓고만 있었고 그 주변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지. 청년이 또 다시 나타났다는 소리에 한달음에 공손 사형에게 달려가보니 그는 전날 밤과 똑같은 부탁을 사형에게 하고 있더군. 그리고 사형 역시 전날 밤과 똑같이 응수하고 있었지. 이번에는 썩 돌아가지 않으면 붙잡아 장을 치겠다는 협박과 함께. 청년은 한동안 사형을 바라보다가 또 다시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그곳을 나갔다네. 그런데 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게야. 급히 따라나가보니 저만치에 있는 범 우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더구만. 이때다 싶어 말을 걸었지. 공자, 저 새끼 범이 정말 공자의 조카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청년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어딘지 물기가 묻어있었어. 청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새끼 범이 또 다시 캥캥 울었지. 하지만 범 우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청년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인지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있었어. 문득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묻더군. 공께서는 공손 장군의 수하이십니까? 내 약소하나마 독립된 군세를 이끌고 있는 유비라는 사람이고, 공손 장군의 객장으로 와 있을 뿐 수하는 아니라고 대답하자 조금 망설이는 눈치더니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주더군. 공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것을 대접에 담아 저 아이가 있는 우리에 넣어주십시오. 제 형수님의 젖입니다. 제가 다가갔다가 한순간을 못 참고 저 병사들을 해할까 걱정이 되어 그러합니다. 내가 그러마, 하고 가죽주머니를 받아들자 그가 나에게 감사를 표했네. 그리고 공자는 이대로 돌아가실 요량인가? 하고 물었더니 세 번은 예를 차려 부탁 드릴 것입니다, 하더군. 아무튼 청년이 그렇게 돌아가고 청년에게서 들은대로 가죽 주머니 안의 액체를 대접에 담아 새끼 범에게 가져다 주었네. 새끼 범은 한참 경계하다가 냄새를 맡고는 다가와 대접 안의 것을 싹 비웠지. 내가 청년의 말을 믿게 된건 그 이후부터일걸세.
그리고 나서 난 다음 날을 내심 기다렸다네. 세 번은 예를 차려 부탁할 거라 했으니 또 온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낮부터 괜히 흥분되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네. 사형을 슬쩍 떠보니 그 쪽도 마음이 어지러운 모양이었어. 그리고는 범 우리와 진채의 방비를 더욱 단단히 했지. 하지만 이중삼중으로 진채를 방비한 것이 무색하게 해가 떨어지자 또 다시 그 청년이 나타났네. 제 형님과 형수님에게 어린 새끼를 돌려주십시오. 청년은 세 번 예를 갖추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번에도 거절당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멀리서 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것도 같았네. 사형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자존심 강한 인사가 순순히 새끼 범을 돌려주겠다고 나설지는 모를 일이었어. 난 나도 모르게 사형을 설득하기 시작했네. 저 청년의 말을 전부 믿을수는 없으나 세 번이나 찾아오며 간절히 부탁하는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지 않겠느냐, 사냥을 나가서도 어린 새끼와 그 새끼를 기르는 어미는 잡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아무리 귀한 범이라 해도 우리 안에 가두어 키우는 것은 안 된 일이니 청년의 부탁을 들어주시는 것이 어떻겠냐, 그에게 은혜를 베풀면 저 청년도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면서.
응. 내심 공손백규를 안좋아했으면서도 그 날 현덕의 사탕발림은 굉장했지.
아니, 난 딱히 공손 사형을 싫어하진 않았어. 그냥 보고 있으면 가끔 안타까울 때가 있었을 뿐이지. 어쨌든 내가 그렇게 등을 떠밀기 시작하니 그때까지 내심 그 청년의 분위기에 질려있던 다른 사람들도 청년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간언하더구만. 그리고 공손 사형도 못이기는 척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듯 했네. 우리를 열고 새끼 범을 데려오라고 하자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어. 새끼 범을 데려다 청년에게 안겨주니 어린 아이를 어르듯 어르더군. 범도 몸을 떨면서 청년의 품에 파고들었고. 청년은 새끼 범을 안은 채 사형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네. 은공이 베풀어주신 자비를 잊지 않겠습니다. 훗날 반드시 보은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고맙다는 듯 인사를 하고 진채를 걸어나갔어. 우린 다들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 들었지. 그리고 그 청년의 정체를 밝혀내겠다며 진채 바깥에 숨어있던 장비가 내게 와 한 말이 무언줄 아는가? 형님, 그 녀석, 진짜 범이오. 진채 바깥으로 흰 범 한 마리가 새끼 범을 입에 물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걸 내가 봤다고! 이봐, 공명. 외면하지 말게.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리고 나서 그 청년과의 재회는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네. 공손 사형이 원본초와 계교에서 맞붙었던 때였는데,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가 고립된 공손 사형을 단기로 호위하며 구해온 것이 바로 그 청년이었어. 보은하겠다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게지.
결국 호랑이를 길들인 것은 공손백규가 아니라 유현덕이었지만.
아무튼 뭐 그렇다는 말이네, 공명. 혹시나 뜻밖의 모습을 보더라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두는 거야.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완벽하게 사람의 형상을 갖춘데다가 인간의 교양과 상식에 익숙하지만 가끔 제 어쩔수 없는 습성이 드러날 때가 있거든. 특히 밤에 잘 때는 거의 호랑이 모습인 채로-
겨울에 옆에서 자면 따끈따끈하고 좋지. 공명선생, 표정이 왜 그러신가? 우리가 농이라도 치는 것 같나? 오, 마침 거의 도착했군. 아마 신야성 밖으로 마중을 나와 있을 텐데. 이봐, 겁 먹은건 아니지?
나중에 친해지면 안마라도 부탁해보게. 그 크고 두툼한 발로 해주는 안마가 아주 일품…, 아니, 이제와서 융중으로 다시 돌아갈 셈인가? 한 번 만나는 봐야지. 어떻게 보면 관우나 장비보다도 순한 사람, 아니 호랑이인데. 자네에게 도움이 많이 될 걸세. 내 장담하지. 아, 저기 보이는군. 보시게, 평소에는 완벽히 사람 형상이라니까? 자룡, 여기! 여기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