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惇] 세상이 멸망하는 날
평상시의 하후돈은 쾌활한 성격의 사람으로, 동료 제장들은 물론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편안한 분위기를 능숙하게 이끌어내는 능력자였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한 험상궂은 인상이었지만 그 얼굴을 찌푸리는 날 보다는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날이 훨씬 많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날 보다는 좋은, 혹은 좋으려 노력하는 날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식사가 차려진 반상을 앞에 두고 제대로 먹지도 않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하후돈을 보는 것은, 기억마저 희미한 어린 시절부터 하후돈을 알고 지내온 조조로서도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원양?"
"……네, 승상."
"자네 어디 안좋은 곳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미 묘하게 대답도 굼뜨다. 조조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새 모이만큼의 밥을 떠 입 안에 넣는 하후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음식을 깨작거리는 이가 아닌데? 분명 어제 저녁을 함께 먹을 때만 해도 훈련을 마치고 온 터라 허기가 진다며 옆에서 조조가 천천히 먹으라고 핀잔을 주어야 할 만큼 속도를 내지 않았던가. 어제와 비슷한 훈련이 오늘이라고 없지는 않았을 텐데 저렇게 힘들게 식사를 하다니.
"안좋은 곳이 없다면 안좋은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그저… 입맛이… 조금 없을 뿐 입니다……."
이 것은 더욱 수상한 대답이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대답하는 하후돈의 얼굴에 한 순간 고통의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조조는 자신의 반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하후돈에게 무언의 명령을 내렸다. 말 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몸이 불편한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한 것인지.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알아듣지 못할 하후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써 담담하려 노력하는 외눈의 눈동자는 끝내 무언가를 조조에게 감추려하기만 할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
"확실히 오늘 하후장군께선 어딘가 좀 이상하시긴 했습니다."
조조의 앞에 불려온 장료와 한호는 하후돈의 상태에 대해 묻는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것을 알아차렸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말조심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느낀대로, 사실대로 고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기병들의 훈련을 참관하시면서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평소라면 진에 대해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시거나 하다못해 농이라도 한두마디 건네셨을 텐데 그저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듯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부대 순시 중에도 거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간혹 먼저 인사를 해오는 병사들에게도 굳은 얼굴로 받아주기만 하셨고요. 그리고 그… 식사에 대해서라면, 아침과 점심 때도 거의 음식을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장 료와 한호가 번갈아가며 오늘 하후돈의 상태가 명백하게 이상했음을 고할때마다 조조는 하후돈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던 고통의 기색을 떠올렸다.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 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일과의 대부분을 함께 있는 저 두사람마저 하후돈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자신에게 이유를 이야기해주지 않는 건가. 화가 나기 이전에 걱정부터 앞선다. 조조는 두 사람에게 그만 나가보라 손짓한 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 십년을 함께 하면서 하후돈이 이런 적은 처음이다. 눈에 화살을 맞아 절체절명의 위기와 고통을 느꼈을 때 조차 하후돈은 반쪽짜리가 된 눈에 대한 제 고통과 고뇌를 숨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들 사이에 감추어야 할 것들이 있을 수 없다. 조조는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하후돈은 이상한 만큼 강적이기도 했다.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가 괜찮다, 아무 일도 없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요지의 말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짧게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들이 가까스로 억누른 고통을 수반하고 있어, 조조는 더욱 안달이 났다. 결국 조조는 자신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하후돈은 대부분의 경우 조조에게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한 사람이었지만 함께 맨 살을 맞대고 조조의 손끝에서 주어지는 쾌락을 채워나갈 때 가장 솔직했다. 분위기를 조금 느슨하게 하기 위해 조조는 체념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애를 먹일 생각인가보군, 원양."
"……."
조조의 불평에 하후돈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고집이 센 놈인걸 왜 이제서야 알게 되는거지. 천하의 조조를 이렇게 애먹게 하다니. 일단 원인을 알게 되면 그 원인부터 도륙낸 후 하후돈에게는 자신을 애먹게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조는 부드럽게 하후돈을 끌어당겨 안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신하를 여전히 총애하다니, 나도 참 무른 주공이지."
"……맹덕."
안 대 위에 머물렀던 온기가 다른쪽 눈에도 살짝 닿았다가 콧등을 타고 내려와 뺨과 입가를 거쳐 언제나처럼 입술 위로 겹쳐진다. 슬쩍 입술을 부비다가 혀 끝으로 사이를 가르자 스륵 열리는 반응은 언제나와 다르지 않다. 하후돈의 뜻밖의 고집에 의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조조는 안쪽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혀를 자신의 것으로 핥아올-
"악!!!!!"
리려 했을 뿐인데…….
뒤 통수를 거대한 돌로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이 몰려왔다. 아니 실제로 무언가 단단하고 거대한 것이 바로 그 뒤통수를 강타한듯도 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게 뭐지? 아, 그래, 내 침소 천장. 조조는 얼얼한 뒤통수의 아픔을 느끼며 자신이 천장을 보고 뻗어있는 이유를 떠올리려 해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이상한 하후돈. 하후돈 원양. 어린 시절부터 오직 조조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사촌. 그래, 바로 그 하후돈.
그러니까 지금, 원양이, 저 하후돈이 이 조조를 냅다 밀쳐냈단 말인가?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조조는 조금 전,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온 몸이 손 끝부터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듯 싸늘하게 굳어간다. 하후돈이 조조를 거부했다. 조조가 무엇을 하더라도 늘 긍정하고 지지하고 따르던 하후돈이. 지금 몰려드는 이 감정이 분노인지 배신감인지 놀라움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 하나는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 뿐이었다.
"이건 정말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로군."
스륵, 뻗어있던 윗몸을 일으키며 말하는 조조의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흠칫 놀랄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후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자신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눈 앞으로 확 불꽃이 튀며 순간적으로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한 조조는 하후돈에게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렸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양? 하후돈이 날 거부하다니, 머리카락 끝부터 발 끝까지 모두 내 것인 네가!"
"맹덕…."
"아, 그래. 오늘 종일 이상해보이긴 했지. 하루 사이에 반역이라도 꿈꾸게 된 건가?"
차 라리 어줍잖은 인간들이 반역이라도 일으켰다 하는 게 낫겠다. 조조의 발언에 하후돈이 경악했지만 조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하후돈의 뺨을 쥐었다. 또 다시 강렬한 고통의 기색이 하후돈의 얼굴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조조의 화를 더욱 돋을 뿐이어서 손에는 점점 센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후돈이 조조의 손을 벗어나려는 듯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힘들게 말을 뽑아냈다.
"…아…파, 맹덕……."
"아파? 감히 그런 말이 나오나, 원양? 아파도 내가 더 아파!!"
"혀가……."
"뭐가 그리 아프고 괴로운가? 말 해. 무슨 딴 생각을-"
"혀가 아프단 말이다!!!!!"
하후돈이 힘껏 밀어내는 통에 조조는 다시 한 번 기우뚱하며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
"그러니까, 혀를 깨물었다고?"
끄덕끄덕.
"같은 곳을 세 번이나?"
끄덕끄덕.
조 조를 밀어내고 다시 입을 가린 채 앓는 소리를 내던 하후돈은 방의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서탁으로 가 痛 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 조조의 앞에 내보였다. 그리고는 또 다시 죽간위에 무엇인가를 줄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말인 즉슨, 어제 기마대의 훈련을 참관하며 장료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처음으로 혀 끝을 씹었다고 한다. 그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훈련을 마치고 허기가 진 상태에서 급하게 식사를 하다가 조금 부어있는 혀를 다시 한 번 깨물었다. 둔한 통증이 가끔씩 밀려왔지만 그래도 참을만 했는데, 저녁에 조조와 술상을 함께 하며 안주를 먹다가 처음 깨물었을 때 보다 혀가 더 부어 있는 탓에 다시 한 번 똑같은 곳을 깨물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밤이 지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부어있던 혀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다가 혀 끝이 조금만 입 천장이나 잇몸에 닿아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정말 바보 같은 이유로군."
"그렇게 바보 취급을 할 까봐 말 안하려고 했, 아으……."
제 분에 못이겨 큰 소리를 지르다가 혀의 씹은 부분이 어딘가에 닿았는지 다시 앓는 소리를 한다.
"입 벌리고 혀 좀 내밀어 봐."
남 은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밥도 제대로 못먹었는데 반역이니 어쩌니 해가며 화는 있는대로 다 내놓고 저런 말이라니, 하는 원망과 비난을 품은 채였지만 하후돈은 어쩔수 없이 조조가 말하는 대로 혀 끝을 살짝 내밀었다. 모르긴 몰라도 노랗게 곪아 부어있을 혀 끝을 보는 조조의 표정이 인정사정 없이 찌푸려진다.
"정말 아프겠군."
그렇다니까!
요리조리 하후돈의 혀 끝을 살피던 조조는 찌푸린 표정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하후돈이 다른 심각한 이유가 있어서 자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 그리고 이것은 이것.
"이번에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 이해해주겠지만, 두 번 다시 날 거부하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 원양."
일 단 쐐기를 박아 둔 조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후돈의 손을 잡고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물어진 입술 위로 처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기색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흠칫 놀란 하후돈이었지만 조조가 그저 그곳에 머물러있기만 하자 몸의 긴장을 풀었다. 아직, 상처가 난 혀 끝은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아프지만 이 정도는 뭐……. 하면서 슬쩍, 그 입술이 곡선을 머금고 휘어졌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