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孔←趙] 상처
「주공과 주모님은 우리가 형주로 잘 모시고 가겠소. 이 혼례로 인해 두 집안의 결속이 더욱 강해졌으니 주모님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누구보다 소중한 분, 그러니 요란스러운 배웅은 그쯤에서 멈추시고 돌아가 오후께 그리 전해주시오!」
공명이 뱃머리에 서서 동오의 군사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조운은 배의 난간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동오의 군사들에게 쫓기는 상황은 언제나 기분이 좋지 못하다. 서로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지도 않은 채 대치하면서 동맹국이라니. 표면의 관계성 아래에는 여러가지 정치적이고 실리적인 상황들이 얽혀있겠지만 이래저래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배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고 오군 병사들이 쏘는 화살들은 거의가 뱃전에도 미치지 못한 채 힘을 잃었다. 이제는 안전권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뒤돌아 선 공명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조운은 공명을 감싸듯 몸을 날렸다.
「군사!!」
우당탕 소리를 내며 조운과 공명의 몸이 갑판을 굴렀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조운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 배의 기둥에 박혔다. 이 거리에서 이런 위력이라면 틀림없이 대궁을 쓸 줄 아는 장수의 소행일 터다. 유비와 손부인이 이미 선실로 들어가 그들이 쫓을 대상이 사라지니 표적을 공명으로 바꾼 것이 틀림없었다. 유비의 목 만큼은 아니지만 공명의 목숨을 취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득이 될 일이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군사?」
「아, 괜…찮습니다.」
공명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많이 놀란듯 했지만 다친 곳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조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먼저 몸을 일으킨 후 공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멈칫하며 그것을 바라보던 공명은 손을 뻗어 조운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공명이 힘을 주어 손을 잡자 순간적으로 조운의 팔이 움찔했다.
「조장군, 혹시….」
「무슨 일인가?」
갑판에서의 소란을 눈치챈 유비가 급한 걸음으로 선실을 나왔다. 병사 하나가 기둥에 박힌 화살을 빼 유비에게 건넸다. 군사를 겨냥하여 날아온 화살이라는 말에 유비의 얼굴에 한순간 분노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공명!」
「저는 괜찮습니다만, 조장…….」
「다행이 화살이 빗나가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공.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공격은 없을테니 그만 들어가 쉬십시오.」
공명의 말을 끊으며 조운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조운과 공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선실로 들어갔다. 한동안 병사들에게 배의 경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조운의 등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던 공명도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선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건업에서 공안으로 향하는 뱃길은 장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다. 밤이 되자 바람도 거세져 배의 흔들림 역시 심해졌다. 조운은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왼팔을 감쌌다. 화살을 피해 공명을 안고 갑판을 구르다 왼팔을 돗대 기둥에 세게 부딫쳤던 것이다. 어깨에서부터 팔꿈치 부근까지 저릿한 통증이 몰려와 흔들리는 침상 위에 누워있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 부목이라도 대면 좀 나을까 싶어 선실 안을 둘러봤지만 쓸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아 결국 선실을 나섰다. 이왕이면 유비와 손부인이 모르는 채로 넘어가고 싶던 일이었다.
선실 밖은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늦은 밤이라 미안하지만 의관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일 듯 하여 병사들의 선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조운은 누군가가 갑판 위에서 내는 기척을 알아차리고는 발소리를 죽였다. 익숙한 이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드문드문 조운에게까지 들려왔다.
「…….」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군사와 유비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유비군 내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아니, 아마 유비가 단독행동을 할 때 경호를 맡는 자신이 유일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고 조운은 생각했다. 때문에 조운은 유비에게 오후의 여동생과의 혼담이 들어왔을 때 공명이 그 일을 적극 추진하는 것을 보며 가끔씩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동안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짧게 겹쳐졌다. 문득 결혼을 위해 강동으로 떠나던 배 위에서 배웅하는 사람들 사이의 공명을 바라보며 유비가 한숨처럼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내가 내 감정대로만 행동해서는 안되는 위치에 있다는 걸 잊고 말았네. 그 때 조운은 유비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짧은 입맞춤을 남긴 유비가 어린 부인이 자고 있을 선실로 다시 들어가버린 후에도 공명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관을 풀고 하나로 묶어내린 머리카락과 긴 옷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뱃전을 부여잡고 있는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워보였다. 조운은 조심스럽게 공명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군사.」
갑자기 들려온 말에 놀란듯 하던 공명은 조운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조장군 이시군요.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장강의 물살이 빨라 보고 있자니 쓸데없는 생각들을 흘려보내기에 적당할듯 하여.」
「그래도 날이 추운데 이런 곳에 오래 계시면 몸이 상하십니다.」
「원래 그런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 걱정을 하실 때가 아닐텐데요. 팔은 좀 괜찮으십니까?」
공명의 물음에 조운은 허를 찔린듯 쓴웃음을 지었다.
「저를 안고 구르실 때 기둥에 부딪치면서 팔을 다치신 것 다 압니다. 부딪치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어요.」
「크게 다친 건 아닙니다. 통증은 조금 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니 뼈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을겁니다.」
「더 크게 다치셨어도 내색하지 않으셨을거 아닙니까.」
가볍게 공명이 소리내어 웃었다. 공명의 말대로 아마 직접 눈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닌 한 유비가 눈치채지 못하게 숨겼을터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비보다는 강동에서 갓 시집 온 새 주모의 입장을 위해서였다. 자국의 공격으로 인해 이쪽의 장수가 상처를 입는다면 그녀의 입장이 불편해질 것은 자명한 일. 그녀가 애초부터 비협조적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고향마저 버리고 유비를 따라온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새 주모께서는 주공이 매우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주공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고향을 등지게 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실리는 없을텐데. 덕분에 강동을 빠져나오는 것이 조금 수월해졌지만 말입니다.」
「…당차고 자기 주장이 뚜렷한 분이셨습니다. 강남 사람들의 기질 탓인지 중원의 여인들과는 다르더군요.」
「과연, 천하 영웅이 아니면 낭군의 자격이 없다 하셨다던 분 답습니다. 장군이 입은 상처가 창상이나 검상처럼 바로 눈에 띄는 상처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다시 배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 공명의 말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배어 있었지만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유비의 결혼을 위해 강동으로 떠나기 전 공명은 조운에게 세 개의 비단주머니를 내주었었다. 동맹을 맺고 있다 해도 강동과는 항상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는 유비군이다.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곳에 유비가 직접 가야 하는 일이니만큼 위험부담이 컸지만 공명이 준비해둔 계책 덕에 유비는 무사히 혼인을 치루고 새 부인과 함께 다시 형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유비와 군신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었을 이 젊은 군사에게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참으로 담담한 모습이다. 그런 공명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제 상처야 한동안 팔 쓰는 것을 조심하면 깨끗이 나을 것이지만, 군사는 어떻습니까? 눈에 띄는 상처가 아니라 다행인 것은 피차 마찬가지일 듯 하나, 저는 제 쪽보다는 오히려 군사 쪽이 더 걱정 됩니다.」
공명은 조운의 말이 뜻밖이라는 듯 조금 놀란 얼굴로 다시 조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표정이 조금 전에 비해 훨씬 깨지기 쉬운 모습이어서 조운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알고 계실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이….」
「아아, 곤란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마음…이었으니까요.」
「군사.」
「…주공께서는, 그 품에 안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을 나눠주는 분 아니십니까. 그 안에서 잠시나마 특별한 존재가 되었었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지요.」
제자리로 돌아가겠다 말하며 미소짓는 공명의 모습은 달빛을 받아 사뭇 처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많이 절망하지 않고, 많이 좌절하지 않는 모습이라 조금은 안심이다. 그 모습을 보니 이미 어엿한 성인이고, 한 세력의 군사이기까지 한 공명이 어딘가 안쓰럽고, 또 대견한 마음조차 들었다. 공명은 조운의 생각보다는 훨씬 강한사람인듯 했다. 조운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공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장군, 지금…….」
「아….」
「설마 지금 저를 위로해주고 계신겁니까?」
공명의 말에 조운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모습에 공명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운이 머슥해진 손을 내리고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할 때까지 계속 웃음을 멈추지 않던 공명의 눈꼬리에는 눈물마저 맺혀있었다. 바람결에 금세 흩어져버리는 물기를 보며 조운도 함께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