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瑜策] 내기
수풀 사이로 짐승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 그 곳에 숨은 것이로구나. 손책은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숨을 죽이고 있던 짐승은 빨라지는 말발굽 소리에 위기를 느낀 것인지 풀쩍 몸을 날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달아나고 있는 짐승은 뿔이 멋지게 돋은 숫사슴이었다. 아직은 조금 찬기를 품고 있는 바람이 손책의 뺨에 스쳤다. 전동에서 화살을 한 대 꺼내어 시위를 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저 녀석만 잡으면…!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는 순간 손책은 그것이 사슴의 급소에 명중할 것을 예감했다.
퍽, 퍽.
빠르게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사슴의 가죽을 뚫고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었다. 명중이다. 그런데 뭔가 다른 소리가 섞여있었다. 뭐지? 손책은 살짝 눈썹을 치켜뜨며 바닥에 쓰러진 사슴에게 다가갔다. 손책의 것이 아닌 화살 한 대가 손책이 쏜 화살과 거의 나란히 사슴의 목에 박혀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챈 손책은 대놓고 표정을 찡그렸다. 슬슬 날이 어둑해지는걸 보아 오늘의 마지막 사냥감은 이 사슴이었을텐데, 하필이면.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와 있는 또 다른 화살의 주인을 알아챈 손책은 쳇, 하고 혀를 찼다.
"내가 잡은 사슴이다."
"내가 쏜 화살도 박혀 있는데."
"이 사슴이 재수가 없어 눈 먼 화살에 맞은 것 뿐이겠지."
"그건 네가 쏜 화살을 두고 하는 말이지, 백부?"
계집애같이 곱상하게 빠진 입술에선 단 한마디도 지는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양쪽을 따라왔던 병사들은 그들의 대화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다. 두 소년 중 누구도 물러서질 않으니 저 사슴을 어느 쪽의 사냥물로 봐야 할지 그들로서는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화살은 거의 동시에 사슴에게 꽂혔고 둘 다 급소 부근이었기에 어느쪽이 더 확실하게 사슴을 잡은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통때라면 주유 쪽에서 한 발 물러났을 터인데 오늘의 그는 전혀 물러날 의사가 없어 보인다. 두 소년이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병사들이 피거품을 문 채 숨이 끊어진 사슴에게서 화살도 뽑아내지 못한 채 전전긍긍 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무장들이 그들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오래간만에 시간을 내어 가신들을 모두 이끌고 사냥에 나온 손견이었다. 그는 사슴의 목에 꽂힌 두 대의 화살과 소년들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기류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단번에 눈치를 챘다.
"이 사슴이 오늘의 마지막 사냥감이 되겠구나. 그런데,"
자신과 주유를 번갈아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걸린 웃음에 손책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한 채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 많은 사냥감 중 하나를 주유에게 양보하는 것은 평소라면 일도 아닌 일이었다. 크게 인심 한 번 쓰는 척, 그래 공근, 예전보다 활 실력이 더 늘었구나, 이 사슴은 네가 잡은 것으로 해주마, 하고 물러서면 될 일이었다. 아, 하지만 오늘은 안돼. 절대 안된다. 다른 날이면 몰라도 공근과 한 막사를 사용해야 하는 날에는 절대.
"그런데 사슴에 화살이 두 대 꽂혀 있구나. 보아하니 하나는 백부의 화살, 하나는 공근의 화살인듯 한데 누가 먼저 화살을 맞춰 이 사슴을 잡은게냐?"
절대 안되는데……. 손책은 아버지의 미소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주유와의 내기에서 지더라도 아버지에게 도량이 넓고 인품이 좋은 어른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 짧은 순간 손책의 마음 속에서는 여러 번의 갈등이 스쳐지나갔다. 그냥 공근에게 양보를 해? 아냐, 하지만 내 화살이 더 빨랐던 것 같은데! 그래도 양보하는걸 아버지가 더 좋아하실거 같아. 하지만 그랬다가 당장 오늘 밤에 벌어질 일은? 손책이 마음속에서 그렇게 널을 뛰는 동안 손견은 함께 있던 가신들과 눈빛을 교환하며 두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의 눈에는 빤히 보이는 고민을 하는 두 소년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손책은 결심했다. 까짓거, 공근과의 내기 쯤이야 다시 결판을 지으면 되겠지. 하지만,
"이 사슴을 잡은 것은 백부입니다, 손장군. 제 화살이 백부의 것보다 늦어, 제가 시위를 놓았을 땐 이미 백부의 화살이 사슴의 목을 뚫고 있었습니다."
한 발 늦었다. 주유에게 선수를 빼앗긴 손책은 순간적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손책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황개가 서둘러 등을 두드려줬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던 손견의 입가에 짖궂은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하냐? 하지만 저 정도 덩치의 사슴이라면 백부의 화살 한 대로 숨이 끊어질 리는 없으니 공근 네가 쏜 화살도 사슴을 잡는 데 일조한 것은 틀림 없구나."
"백부의 실력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저 사슴은 너희 두 사람이 함께 잡은것으로 하자. 분명 먼저 화살을 쏘아 맞춘 사람이 있겠지만 나머지 한 대의 화살이 있었기에 더 수월하게 사슴을 잡은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공평하지 않겠느냐?"
손견의 판결은 사슴을 잡은것에 대해서는 공평한 일이었지만 손책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저 여우같은 자식! 기침을 조금 진정시킨 손책이 가만히 주유를 흘겨봤지만 주유는 시치미를 딱 뗀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소년의 모습을 보던 손견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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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소주공의 무예솜씨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주공."
사냥터를 떠나 근처 아영지에 준비해 놓은 막사 안에서는 낮에 잡은 사냥감을 안주로 한 연회가 벌어졌다. 사슴 사냥의 일로 뚱하게 자리에 앉아있던 손책은 누군가 제 이야기를 꺼내자 반사적으로 자세를 고치고 표정을 바로 했다. 옆에 앉아있던 주유가 큭큭 웃었지만 대놓고 대거리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흠, 그런가? 하긴 저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무골이 있긴 했지."
"오늘 사냥만 보아도, 노리는 짐승마다 백발백중으로 화살을 맞추어 잡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그대로 몇 시진만 더 사냥터를 누볐다면 이곳 짐승들의 씨가 말라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봐, 이보게들. 너무 그렇게 띄우지 말게. 저 녀석은 아직 미숙해.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아이라네. 그렇지 않느냐, 책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손책을 자가 아닌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손견은 이미 거나하게 술에 취한듯 했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칭찬이 기분 좋은 듯 표정에서는 감추지 못한 뿌듯함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실상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제 손견의 군대 내에서 무기를 들고 손책과 대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의 수밖에 남지 않았다. 손견의 부름을 받은 손책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예를 취했다.
"아버님 말씀이 옳습니다. 소자, 아직 이 곳의 여러 분들께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 아직 많이 배워야지. 아무렴."
"소주공께서 이토록 배움에의 뜻이 깊으시고, 스스로 단련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시니 참으로 주공의 복이요 우리 군의 자랑이 되실 만 합니다, 주공."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손책을 칭찬하며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손책은 상 위의 술잔을 들어 그들에게 감사의 예를 표한 뒤 술을 들이켰다. 그게 신호인 양 연회는 한층 더 왁자지껄해졌다. 손책은 자리에 앉으며 흘끔 옆자리의 주유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보란듯 손책을 비웃을 때와는 다르게, 곱상한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즐거운듯 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술자리는 밤이 더 깊어진 뒤에 끝이 났다. 아주 드물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손견을 전용막사까지 부축하고 침상에 눕힌 손책은 마지막으로 이불까지 잘 여민 후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 그의 아버지는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연회자리가 섰던 막사를 정리하고 있는 병사들을 지나 자신의 막사 앞에 선 손책은 잠시 망설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막사에 와 있던 주유는 침의만을 걸쳐입은 채 사냥터에까지 챙겨온 금의 현을 한 줄 한 줄 튕겨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손책이 막사 안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로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손책은 주유의 눈을 마주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그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건 손책 자신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쯤 포기상태에 있었다.
"자, 솔직하게 말해. 허풍은 통하지 않아. 모두 몇 마리 잡았어?"
"토끼 세 마리, 꿩 두 마리, 노루 한 마리, 족제비 한 마리, 멧돼지 한마리."
주유의 대답을 들으며 손책은 낮에 자신이 사냥한 것들을 떠올려 대조했다. 자신이 잡은 사냥감도 그와 비슷비슷해 정말 이거다 싶은 차이를 두려면 역시 그 사슴을 온전히 잡았어야 했다. 손책이 쳇 혀를 차며 앞에 선 주유를 밀어버리고 옷걸이 앞으로 걸어가 그때까지 거추장스럽게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던졌다. 손책을 따라오던 주유가 바닥에 떨어져 구겨진 장포를 주우며 쯧쯧 혀를 찼다.
"왜, 사냥감이 모자라? 사슴 있잖아."
"그 사슴은…!"
빌어먹게도 내가 혼자 잡은게 아니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손책의 뒤로 장포를 잘 정리해 옷걸이에 걸어둔 주유가 다가와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았다. 귀찮은듯 그 손을 떼어버리려던 손책의 귓가에 웃음을 참는 주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슴도 넣어. 내가 기껏 양보해줬는데."
"양보는 누가. 그리고 만약 그 사슴까지 센다면 오늘밤 아래는 완벽하게 너야."
"셈은 똑바로 하자, 백부. 내가 사슴을 양보해줬으니 네가 윗자리를 양보해줘야 맞는 일 아니겠어?"
"아, 그래. 너무 순순히 양보한다 했더니 그런 꿍꿍이가 있으셨구만? 안돼. 인정 못해. 아버지 말씀대로 그건 너랑 나랑 반씩 셈하는 거다."
"쳇."
주유는 흥이 깨진듯 손책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금 앞에 비스듬히 앉았다.
"그럼 뭘로 정하지? 그냥 네가 사슴을 양보받고 내가 윗자리를 양보받는게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주유의 질문에 손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가 있을까, 저 녀석을 확실하게 눌러 오늘 밤 내 밑에서 앙앙대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창이나 칼을 들고 비무를 겨룬다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 야심한 시간에 칼부림을 한다면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손견은 이미 잠들어 있겠지만 그 외에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웬만하면 이 막사 안에서 해결 볼 수 있는 것. 자신이 주유를 월등한 실력으로 누를 수 있는 것. 머리를 굴리던 손책은 뭔가 생각난 듯 짝 박수를 쳤다.
"바둑! 바둑이다. 내기를 하는 데는 바둑만큼 확실한 것이 없지!"
손책의 말에 주유는 잠시 낭패인 표정을 지었다. 손책은 한평생 바둑만 두고 살았다는 꼬장꼬장한 노인네들도 한 수 접어줄 정도의 실력자였다. 주유와 바둑을 둘 때면 열에 아홉은 손책이 이기곤 했다. 손책은 주유의 표정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 드디어 저 계집애같은 얼굴이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매달리는걸 볼 수 있겠구나. 하지만 그 자신감도 잠시뿐, 주유가 가볍게 금의 현을 퉁기며 한 말에 손책은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 뜯을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안됐지만 백부, 이 곳엔 바둑판도 바둑돌도 없어."
그랬다. 이곳은 오랫동안 주둔할 것을 목표로 세운 진영이 아니었다. 손책은 바둑을 좋아했지만 바둑보다는 사냥을 더 좋아했기에 사냥을 오면서 바둑판을 챙겨올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주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것이 불안하다.
"지금 당장 있는 것들을 이용해야지 백부. 그런 의미에서 탄금으로 결정하는 것은 어떨까? 같은 곡을 한 번씩 연주해서 더 많이 틀린 사람이 아래로 가는거야."
"동탁보다도 더 지독한 자식."
바둑에서 주유가 손책을 이길 수 없듯 탄금을 두고 손책이 주유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손책은 금을 비롯한 악기를 다루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그에 비해 주유의 탄금은 들어본 사람들마다 감탄하며 칭찬하는 실력이었다. 황궁의 궁중악사들보다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떨어지는 실력은 아닐 거라는 말도 들은 적도 있다. 그런데 뭐? 지금 탄금으로 상하를 가리자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 시간에 금 뚱땅거리다가 사람들 다 깨울 일 있냐?"
"이왕 가지고 온 거니까 활용하는게 좋잖아?"
"안돼."
"…그럼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시지요, 소주공."
손책은 조금 심통이 난 기색의 주유를 슬쩍 올려다보다가 예고도 없이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갔다. 문답무용. 뭐야, 왜그래 하며 주유가 대응하기도 전에 주유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밀어 쓰러뜨린 뒤 그 허리 위에 올라타 앉았다.
"장유유서.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 주공근."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저리 비켜!"
아래쪽에서 주유가 손책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완전히 밑에 깔려있으니 쉽진 않을 것이다. 손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유의 턱을 잡고 입술을 맞부딪쳤다. 반항이 더 심해져서 금방 뗄 수밖에 없었지만.
"아 좀, 자세까지 다 잡혔는데 그만 포기하면 안돼?"
"포기는 무슨, 손백부. 너 여기서 더 하면 그거 강간이야!"
"원래 이런건 하다보면 안돼요돼요돼요돼요 이렇게 되는거 아니었어?"
"웃기지 마!"
계속되는 주유의 저항에 손책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주유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대로 일을 치룰 수도 있긴 했지만 저렇게 저항이 심한 상태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았고, 또 손책도 그렇게 억지로 주유를 안고 싶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법으로 제 스스로 깔리는 걸 납득하게 한 후에 일을 치루는 편이 서로 편했다. 한동안 주유는 손책의 아래에 깔려 버둥대느라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그 앞에 앉았다. 어떻게 정하지? 천 팔백년 쯤 후라면 가위 바위 보라도 해서 위아래를 가릴텐데. 지금 이 곳에서 구할 수 있는 한정된 도구들을 가지고 이 막사 안에서 되도록 바깥의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그리고 이왕이면 주유보다 확실하게 우위를 차지할 수 있으면서도 사나이답고 깔끔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골몰하던 손책의 머리속에 아버지를 막사로 모셔드리고 오면서 봤던 광경이 퍼득 떠올랐다. 손견을 비롯한 장수들이 진탕 마시고 즐겼던 막사를 정리하던 병사들. 그래 술. 술이라면 분명히 아직 많이 남아있을터였고 술동이 한 개와 술잔 두 개만 들고 온다면 이 막사 안에서 조용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손책은 주유보다 술이 셌다. 그것도 제법 많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잠시만 기다려."
손책은 주유에게 짧게 고한 뒤 주유가 잡을 새도 없이 장포도 걸쳐입지 않고 막사를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손책의 손에는 제법 큰 술항아리 하나와 술잔 두 개가 들려 있었고 그 모습에 주유는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주유에게 가까이 온 손책은 술항아리와 술잔을 내려놓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마시자. 먼저 취하는 쪽이 아래다."
"이건 불공정해."
"공정하다고 자부한다. 너 아까 연회석에서 술 한 잔도 입에 안댔지? 난 그 때 마신 술만 해도 벌써 이 항아리의 삼분의 일은 돼."
쪼로록. 손책은 먼저 주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른 후 자기 잔에도 넘치기 직전까지 술을 채웠다. 자 마셔 마셔. 손책이 자기 술잔의 술을 쭉 들이키며 마시라고 손짓을 하자 잠깐 술잔을 내려다보던 주유는 결심을 한 듯 술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그리고 술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손책이 다시 술을 따랐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고 잔을 더해갈수록 술을 마시는 속도도 빨라져 한식경쯤 후엔 술 항아리의 술이 반 이상 줄어 있었다. 몇 잔째인지 모를 술잔을 내려놓은 손책은 이미 술이 올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드는 주유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먹였으면 주유는 거의 한계에 달했을 것이다. 손책 자신도 조금 정신이 띵 하긴 했지만 주유에 비하면 매우 멀쩡했다. 손책은 주유의 눈 앞에 손가락 두 개를 흔들어보이며 물었다.
"공근, 공근 여기 봐봐. 자, 이거 몇 개?"
"……."
다시 손가락을 세 개로 늘린다.
"몇 개?"
"…백부."
턱, 주유가 눈 앞에서 흔들고 있던 손책의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손책은 맘이 흐뭇해졌다. 그래, 정말 먹기 좋게 익었구나. 손책의 손가락을 잡은 주유는 여전히 실실 웃으며 손책에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술잔을 놓은 반상에 상반신이 가로막히자 잠시 인상을 찡그리다가,
"이런 건 필요 없어!"
하며 와장창, 바닥으로 상을 엎으며 다짜고짜 손책의 위로 올라 탔다. 어, 어?! 손책이 어떻게 대응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잠깐! 너 취했지?!"
"안취했어!"
"취했잖아! 그러니까 지금 깔려야 하는건 너라고!"
"안취했다고!!"
"야, 읍!!"
순간적으로 다가온 주유의 입술에 손책의 입이 막혀버렸다. 하마터면 치아끼리 부딪쳐 대형참사가 일어날 뻔 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습적인 접문에 성공한 주유는 내친김에 손책의 입 속으로 혀까지 넣어 구석구석 핥고 빨고 쓸고 있다. 도대체 술에 취한 놈이 힘은 왜 이렇게 센거야! 손책이 팔을 뻗어 주유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 안을 온통 헤집는 혀 때문에 숨이 막혀왔다. 등을 퍽퍽 내려치자 귀찮은 듯 손목을 잡고 바닥에 눌러버려 손책은 더욱 꼼짝 할 수 없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결국 손책이 온몸을 뒤틀면서 저항하자 그때서야 아쉬운 듯 입술이 떨어졌다.
"넌, 숨도, 안 차냐?"
부족한 숨을 쉬느라 헉헉대면서도 침 때문에 반들반들 윤기가 나는 주유의 입술을 본 손책은 울화가 치밀었다. 진짜, 도대체 왜, 저 얼굴을, 저 아까운 얼굴을 위에서 여유있게 내려다보질 못하니, 왜! 그리고 그런 심정에 불이라도 지르는 듯 주유가 손책을 내려다보며 또 다시 실실 웃음을 쪼갰다.
"넌 안돼, 백부."
"뭐가 안돼!"
"다른 건 다 네 뜻대로 해줄 수 있는데, 이건 안돼."
"왜 안되는데?!"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안돼. 내가 널 훨씬훨씬 더 많이 좋아하는데,"
깔리기까지 하면 너무 억울하잖아.
손책의 얼굴이 순식간에 귀끝까지 새빨개졌다. 저항하던 몸짓도 함께 멈추자 주유는 희희낙락하며 손책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 자식,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긴 하는거야? 어쨌든 확실히 알겠는 것 한가지는 주유가 정말 많이 취했다는 것이었다. 제정신으로는 듣는 쪽도 부끄러운 저런 낯뜨거운 말 따위 할 수 있을리 없다. 어느새 심의 아래 속옷까지 벗겨낸 주유는 할짝할짝 손책의 귓가를 핥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밑져보긴 처음이다. 내기에서 이겼는데 본전도 못찾는다니. 이 빚은 내일 아침에 반드시 받아내고 말겠다. 무슨 말을 했는지 그대로 읊어보라고 해야지. 혹시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하면 흠씬 두들기고 밤엔 반드시 깔아버리고 말테다. 그렇게 속으로 끝없이 투덜대면서도 손책은 팔을 들어 주유의 등을 감싸안았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