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閼庾] 은애2
풍월주 비재의 마지막 관문인 무술 비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 비재를 위해 수련에 힘쓰던 화랑들도 오늘만큼은 내일의 비재에 최상의 몸상태로 참가하기 위해 일찍 돌아간 탓인지 짙은 어둠이 깔린 수련장에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가장 늦게까지 수련장에 남아있던 알천은 달이 중천에 떠오르는 것을 본 이후에야 들고 있던 수련용 목검을 내려놓았다.
내일 있을 무술 비재에서 그들은 반드시 가장 유력한 후보인 보종을 꺾어야 했다. 비록 덕만이 무사히 공주로서 인정을 받았다지만 여전히 수많은 귀족세력과 병부의 세력을 쥐고 있는 미실에 비하면 그들은 약세일수 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미약한 왕권의 뒷받침과 양날의 검 같은 가야세력 뿐. 그리고 그런 열세 속에서 무거운 책임감만을 등에 진 채 풍월주 비재에 임해야 할 유신을 생각하니 알천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쯤은 그도 집으로 돌아가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까. 수련장을 빠져나오며 알천은 묵묵히 수련을 거듭하던 유신을 떠올렸다. 분명 부담이 많을 터인데 그는 그런 기색따위는 내비치지 않는다. 한 마디쯤 약한 소리라도 해온다면 위로의 말을 돌려줄 수도 있을 것을. 알천은 그것이 못내 서운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힘든 것을 묵묵히 감내하는 성정의 유신이기에 자신이 이렇게까지 그를 마음에 품게 된 것이리라. 그런 생각들을 하며 발길이 닿는대로 걸음을 옮기던 알천은 퍼득 귓가를 스치는 둔탁한 마찰음에 자신이 용화향도의 수련장 근처까지 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알천의 생각 끝에는 늘 유신이 있다. 알천은 몰려드는 자조를 숨기지 않으려는 듯 홀로 미소지었다.
작은 화톳불 하나만을 피워놓은 유신은 알천이 수련장으로 들어선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핫, 하는 짧은 기합소리, 절도있는 동작,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선을 그리는 몸놀림. 평소보다 더 긴장한듯한 표정이 언뜻 불안함을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전 보다 더 큰 마찰음들이 몰아치고, 내지르는 기합소리와 함께 수련용 허수아비를 내려친 유신의 목검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잠시 허탈한듯 검을 내려다보던 유신이 들고 있던 목검을 던져버리고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웠다. 알천은 유신에게로 다가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유신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정작 내일이 오기도 전에 자네가 먼저 상하겠네."
"알천랑."
"오늘 같은 날은 일찍 들어가 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말 끝에 매달려있는 책망을 느꼈는지 유신이 누운채로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알천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집에 일찍 들어간다 해도 쉬이 잠이 올것 같지 않아서……."
"그런다고 해서 이렇게 무리하면 되는가. 다른 화랑들은 모두 일찍 돌아갔네."
"나도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스스로 말해놓고도 설득력 없는 변명이었던지 짐짓 숨을 고르는 척 딴청을 피운다. 사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안함을 잊기 위한 행위인 것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알천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 들어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비재는 공정하고 엄격한 것일세. 만약 우리가 대결을 하게 된다면 아무리 우리 둘 다 공주님의 사람이라 해도 난 자네를 봐 줄 생각이 없어."
"하하, 천하의 알천랑께서 정식 비재에 손속을 두실거라 생각하진 않아."
"나도 그렇지만, 누구랑 겨루게 된다 해도 힘든 상대가 될 걸세."
"……알고 있네. 이렇게 자네에게 들켜서 혼나게 될 것을 알았다면 일찍 도망갈 것을 그랬지."
농을 치듯 대답하며 웃는 유신을 바라보던 알천은 그에게 그만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은 유신의 굳은살이 박힌 손은 땀으로 차갑게 젖어 있었다. 아마도 이 손은 내일이면 또 다시 상처 투성이가 되겠지. 누워있던 유신이 일어날수 있도록 힘주어 잡은 손을 끌어당기던 알천은 순간 울컥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른쪽 팔로 그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 혀 끝으로, 늘 전하고 싶었던 말이 맴돌지만, 그것이 지금은 불필요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유신이 당황하는 것을 느끼면서 알천은 그 말을 삼키기 위해 노력했다.
"알천랑?"
"……내일, 최선을 다 하게. 자네의 무운을 빌겠네."
떨리는 목소리의 이유를 유신이 알아채지 못하길 바라면서, 알천은 유신을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