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月庾] 그리워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던 성벽 위에서 신라군의 승리를 알리는 뿔피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백제의 장수는 유신의 칼날에 부상을 입은 채 무장해제를 당했고 패잔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속속 항복했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불꽃과 곳곳에 널려있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전투의 치열함을 알려주는듯 했다.
일개월여에 걸친 포위작전이었다. 과연, 그곳은 악명높은 난공불락의 성이었고 유신을 비롯한 신라의 병사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신라군의 병영 안, 상장군 김유신의 아문기가 걸려있는 깃대에 부표를 매단 화살이 꽂힌 것은 유신이 이대로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 군을 철수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쯤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부표에는 백제군의 보급부대가 지나갈 길목과 날짜, 시간, 수송대의 수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장수들 사이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믿고 군을 움직일 수 없다는 회의론이 일었지만 유신은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부표에 적힌대로의 장소에 매복을 했다. 그리고는 정확히 그 장소, 그 시간에 백제의 보급부대를 만나 성 안의 백제군에게 보내지려던 군량의 대부분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 기습이 성공해 다시금 백제의 성을 공략하는 작전에 물꼬가 트였어도 다른 이들에게선 여전히, 어떻게 군의 책임자가 그런 불확실한 정보를 믿고 군을 이끌고 나갔느냐 하는 쓴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유신은, 그 부표 안에 쓰여있는 글자들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
"…이 자를 하옥하고 성문을 활짝 열어라. 성 안쪽에 임시 진영을 구축하고 패잔병들을 감시할 군사조와 성을 방비할 군사조를 편성한다."
유신의 명령을 받은 대대감 몇이 백제의 장수를 끌고 나갔다. 이미 수많은 전쟁터를 경험한 병사들은 유신의 명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성 안에 새로운 막사가 차려지고 승전의 사후방비를 끝낸 유신이 오랜시간의 전투로 지친 몸을 쉴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새벽달이 성의 망루 위로 떠오른 뒤였다.
자신의 막사 안에서 호위병들도 물리친 채 혼자가 된 유신은 거친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감싸쥔 채 침상 위로 털썩 걸터앉았다. 갑옷을 벗고 가벼운 옷을 갈아입은 후에도 품 안에 갈무리해 두었던 부표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처음 백제의 보급부대를 알려온 부표가 도착한 이후, 오늘 백제의 성을 완전히 제압하기 전까지 두 번의 화살이 아문기의 깃대에 더 꽂혔다. 그것들 역시 백제군의 기밀을 담은 채였다. 하지만 유신에겐 내용보다도, 그것을 담고 있는 부표 자체가 더 놀라웠다. 그 내용들을 이루고 있는 글자는, 유신에겐 더없이 익숙하고 그리운 필체였다. 그리고 스치듯 마주친 대야성의 전투 이래, 처음으로 접하는 월야의 흔적이었다.
"월야……."
그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보는 것도 얼마만이던가. 품 안의 부표를 꺼내어 손가락 끝으로 애무하듯 글자들을 어루만지던 유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때, 그 동굴 안에서 동맹의 파기를 이야기하던 월야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월야가 아파할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말이었다. 누가 보아도 명확한 상황, 명백한 현실을 그처럼 명민한 이가 모를리 없었다. 단지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것 뿐. 하지만 그라면 그런 아픔쯤은 딛고 다시 자신의 손을 잡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제군이 노호와 같이 밀려들어오던 대야성에서 복야회의 군사들이 나타나 수세에 몰린 신라군을 지원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유신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에 기뻐했다. 난전의 한중간에도 익숙하게 복야회의 군을 이끌며 유신의 군을 뒷받침하는 월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신라와 함께 섞이는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러한듯 했다. 복야회의 군사들은 신라군과 협력하여 힘든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지은 이후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유신의 앞에 섰다. 일천이 넘는 군세, 하지만 그들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동반자로서, 또한 연인으로서 유신의 앞에 있어야 할 월야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전투중에 어딘가 잘못 된것이 아닌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아 안면이 있는 복야회의 간부를 발견하자마자 그를 붙잡고 물었다.
- 월야는, 월야는 어디 있는건가? 왜 보이질 않아, 혹시 전투중에 무슨 변이라도 당한건가!
- 왕자님께선 전세가 신라쪽에 기울어진 이후 전선을 빠져나가셨습니다. 복야회의 전권을 유신공께 맡기고 저희들도 신라인들과 함께 섞여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 어째서 나를 만나지도 않고 먼저 전장을 떠났다는건가. 도대체 어디로.
- 그것은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다시는 서라벌 땅을 밟지 않을거라 하셨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유신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다그치는 유신에게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말을 이었다.
- 유신공껜, 부디 대의를 이루시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월야가 유신에게 남긴 것은 진실로 그 한마디 뿐이었다. 그것이 믿기지 않아 달려간 복야회의 산채에도 월야의 흔적은 없었다. 텅 빈 산채에 정리되어 있는 복야회에 대한 두루마리들과 반으로 찢겨 바닥에 나뒹구는 육란귀 깃발을 보고서야 유신은 진정으로 월야가 가야를 포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과의 관계 역시 놓아버렸음을 깨달아야 했다.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가야를 포기하는 것, 이미 끝났다고 인정하는 것이 월야에게 얼마나 힘이 들 일인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강한 이이니 괜찮을거라고, 그것이 월야와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많이 아팠던 것일까. 유신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반쪽짜리 육란귀 깃발을 주워들었다. 깃발의 한쪽 귀퉁이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번져있었다.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다고, 이렇게 잃기 위해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본들 더 이상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자신은 그저 함께 나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평생을 걸 대의 앞으로, 천년에 남을 역사 앞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연모하는 이와 함께.
서라벌로 돌아와 유신은 월야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자신을 원망한다 해도 좋고 미워한다 해도 좋았다. 그 원망도 미움도 돌아와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월야에 대한 작은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월야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지쳐가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그렇게 떠난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것을 보낸건가."
그렇게 힘들줄 몰랐다고, 아플줄 몰랐다고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서, 가지 말라고 매달릴 새도 없이 혼자 떠난 주제에. 차라리 이 부표가 매달려있던 화살에 예전처럼 날 죽이겠다 쓰여있다면 나을것을.
지금쯤, 신라군에게 함락당한 이 백제의 성을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까? 자신은 눈치채지 못할,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기만 한다면 한달음에 뛰어갈 수 있을 어느 곳에서. 왜 하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모습은 눈물에 젖어있던 눈과 울음을 삼킨 목소리였는지, 어째서 기억하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지만, 자신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유신은 종이 위의 글자를 쓰다듬던 손을 올려 시큰해지는 눈을 꽉 눌렀다. 상장군의 아문기에 화살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으면서 자신에겐 그림자조차 보여주지 않고 이런 정보만 남겨두었다는건, 그는 자신을 다시 만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도울만큼 아직은 그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고, 그러니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줄 것이라고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아니, 지금은 그 어느쪽의 가능성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느 한쪽에 매달려 절망하거나 기뻐하기엔 밀려오는 그리움이 너무 컸다. 아마도 오늘 밤은 그 그리움에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 될 것이다. 유신은 잇사이로 새어나오려는 목이 멘 신음을 참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손에 쥐어져 있던 월야의 흔적들이 바스락거리며, 아픈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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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백제의 성이 불타고 있었다. 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이번에도 자신이 보낸 정보를 믿고 군을 움직여, 이제는 아마 성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을 것이다. 월야를 따르는 몇명의 무리들은 신라군이 백제의 성을 공격하기 직전에 성을 빠져나와 합류하기로 약속한 장소를 향해 오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신라에 복속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월야를 따르겠다며 거의 제멋대로, 떠나려던 월야를 따라온 이들이었다. 또한 월야가 훈련시킨 최고의 첩보원들이기도 했다.
머리 위로 회갈색의 비둘기 한마리가 다리에 전서를 매단 채 월야의 뒤에 서 있던 설지에게로 날아들었다.
"전황 소식입니다. 신라군이 제때 군을 움직여 승전이 확실하다 합니다."
"그래.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월야는 좀 전까지 바라보고 있던 백제의 성을 뒤로하고 말을 달렸다. 뒤를 따라오는 설지는 그런 월야에게 묻고싶은 것이 많은 기색이었지만 월야로서는 그다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한참 말을 달려 도착한 장소에는 기다리던 이들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복야회와 가야를 포기하고 떠나온 뒤 월야는 잠시 옛 대가야의 땅을 유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야의 것이 아닌 산천. 그런데도 그 곳에는 여전히 순리대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땅에서 월야는 제 손으로 찢어서 가지고 온 반쪽의 육란귀 깃발을 불에 태웠다. 그의 나라는 그렇게 작은 불꽃 속에서 한줌 재로 흩어진 채 사라졌다.
그 뒤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일 없이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아직 고구려의 땅까지는 가보지 못했지만 백제의 사비, 웅진, 탄현 등을 돌아보고 신라와의 국경지대를 밟아보기도 했다. 그 사이, 백제와 신라는 여전히 크고 작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신라의 상장군 김유신의 이름이 들려와, 월야에게 두고 떠나온 연인이 홀로 고된 길을 가고 있음을 잊을 수 없게 했다.
"왕자님."
"자네는 아직도 나를 왕자라 부르는가."
일행과 모두 합류해 근처의 산속에서 노숙을 위해 피운 모닥불 앞에서, 월야의 등에 모포를 덮어준 설지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그 호칭은 쓰지 말아달라 부탁했는데도 여전히 설지는 월야를 왕자로 부르고 있었다. 월야의 지적에 머쓱한 표정을 짓던 설지는 나뭇가지를 들어 모닥불 안에 던져넣으며 월야에게 물었다.
"어째서 유신공께 직접 백제의 정보를 써서 보내신겁니까."
"……내 필체를 알고 있는 유신이라면 그 정보를 믿고 움직일거라 생각했네."
"그런 것을 여쭌게 아닙니다."
오늘따라 설지는 집요해보였다. 월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작은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응시했다. 불타고 있던 백제의 성과 함께 오늘, 또 하나의 승전을 올린 유신이 떠올랐다. 그는, 그가 선택한 대의에 조금쯤은 가까워진 것일까. 월야의 입가에 힘없이 웃음이 걸렸다.
"우리의 백성들이 이제 신라인으로 살아갈테니, 그들을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이렇게 위험한 일에까지 끼어드실 요량이셨으면 그냥 서라벌에, 유신공의 곁에 남으셔도 됐던 일 아닙니까."
"자네, 내가 신라를 도운 일로 화가 난 겐가."
"그런게 아니라-."
"그런것이 아니라면 이제 그만 하게. 어쨌든 그들을 돕는 일이 신라 안의 가야 백성들을 돕는 일이니까. 자네도 피곤할테니 그만 쉬어. 내일은 매리포쪽으로 걸음을 해 볼 생각이니 나도 좀 쉬어야겠네."
설지의 말을 자르듯 대꾸하며 월야는 자리를 잡고 몸을 뉘였다. 석연치 않은 기색의 설지가 제 자리로 멀어지는 것을 보며 뒤척이다가 바라본 밤하늘에는 쏟아질듯한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월야는 그 별들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일곱개의 북두칠성을 눈으로 쫓았다. 그것은, 유신의 벗은 등에 새겨진 점들과 비슷한 모양의 별이었다.
설지가 자신에게 하고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월야는 알고 있었다. 그의 물음은 '왜 신라를 떠나왔냐' 가 아닌 '왜 유신의 곁을 떠나왔냐' 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특별히 내색을 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하던 설지가 유신과의 관계를 모를리 없었다. 그렇게 버려두듯 유신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월야는 스스로도 많은 변명으로 납득시켜야 했다. 유신과 여왕의 정치적 입장, 그 사이에 자신이 다시 낄 경우, 이미 한번 신라 왕실에 대해 반역자로 낙인찍힌 자신을 계속 곁에 두었을 때 유신이 감수해야 할 위험들. 끊임없이 생겨날 유신의 정적들은 틀림없이 자신을 이용해 유신을 궁지에 빠뜨리려 계획할 것이었다. 그것은 유신에게도, 여왕에게도, 그리고 이젠 정말 신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가야의 백성들에게도 하등 좋을 것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월야 자신에게도 완벽한 신라인이 되어 산다는 것은 무리였다. 적어도 자신 하나만은 마지막까지 가야인이어야 할 것이라고, 그것이 사라진 제 나라와, 그 나라 사람으로 죽어간 다른 많은 가야인들에 대한 마지막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그럴싸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유신을 만났던 때,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끝이 조금씩 마모되어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처음 유신의 입으로 그동안 부정해오던 현실을 들었을 때만큼 날카롭게 폐부를 찢는듯한 아픔은 아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된 것 역시 아닌 것이다. 인정할 수 없었던 현실과, 불가능한 꿈을 향해 내걸었던 인생을 그의 입에서 지적받는다는 것은, 월야 자신이 상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이 아픈 일이었고, 더 많이 외로운 일이었다.
원망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그를 원망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는 월야가 눈돌리고 있던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주었을 뿐. 그리고 그 말 안에는 어쩌면, 월야를 걱정하는 뜻이 가장 많이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 늘, 월야에게 진심을 다했던 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었다.
함께 가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 손은 언제나 월야를 향해 내밀어져 있었으니 월야는 잊혀져갈 망령들에게서 벗어나 늘 따뜻했던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되었던 거다. 하지만 월야는 끝끝내 도망치고 말았다. 유신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순간 치솟던 그것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울분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한 허무함, 맹목적으로 매달려 왔던 신념은 이미 실체를 잃은지 오래였고 견고하게 쌓아왔다 생각한 긍지는 한갖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현실은, 월야의 안에서 온갖 더러운 감정의 찌꺼기들을 불러일으켰다.
두려웠던 것이다. 제 약함으로 인해 다스리지 못한 그것들이, 그의 곁에서 신라의 대의를 위해 함께하는 순간순간 언제 유신을 향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리하여, 그 언젠가, 유신을 향하는 마음이 연모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것이 월야는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
제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해 말 한마디 못하고 정인을 버리듯 떠나왔으니 정말 못난 사내가 아니던가. 욕지기가 터져나올것 같은 느낌에 월야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그것은 월야로서도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신의 말과 함께 가야는 사라졌고, 오랜시간 매여있던 가야의 왕자자리 또한 사라졌다. 월야에게 남은 것은 이제 오직 하나, 김유신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자신의 어리석은 미련 때문에 변하게 된다면, 그래서 모든것을 잃고 단 하나 품게 된 그 마음마저 잃게 된다면 월야는 더 이상 살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잃지 않기 위해 떠나왔다고, 먼 곳에서, 숨쉬는 순간순간마다 심장을 적시는 그리움이 유신을 향한 마음 하나는 진실될 수 있게 지켜줄 것이라 믿어서, 너를 원망하여 떠난것이 아니라, 내가 나약하여 떠나온 것이라고.
"유신……."
악 문 잇사이로 힘겹게 유신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어느새 불씨가 꺼져 사그라들고 있는 모닥불 위로 싸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둥글게 웅크린 월야의 등 뒤, 밤하늘의 북두칠성 옆으로 별 하나가, 눈물처럼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終.
B.G.M 임형주 - 그리워